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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향기/가끔요가도해

[스크랩] 제 3의 눈 명상법 / 오쇼 라즈니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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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간에 집중하고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精髓:prana)로 가득 차게 하라. 그리고 정수리에서 빛이 쏟아지듯 호흡의 정수가 쏟아지고 있음을 느껴라.

이 방편은 가장 심오한 명상 테크닉 중의 하나이다. 이를 이해하라. '미간에 집중하라······ . ' 생리학자들은 미간에는 인간의 몸 가운데서 가장 신비스러운 부분인 '샘(galand)'이 있다고 말한다. 송과선(pineal galand)이라고 불리는 샘은 티벳에서 '쉬바네트라(shivanetra)'라고 불린다. 그것은 시바의 눈, 제3의 눈, 탄트라의 눈을 뜻한다. 이 눈은 미간에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은 아직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 기능을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라도 작동될 수 있지만 저절로는 절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그것을 열기 위해서는 어떤 수련이 필요하다. 이 제3의 눈은 눈먼 것이 아니라 닫혀 있을 뿐이다.

궁을 명상 수련법이 바로 제3의 눈을 여는 테크닉이다. 이 방편은 가장 간단한 집중법이다. 그대는 사실 몸의 어떤 부분에도 쉽사리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미간에, 제3의 눈에 집중하면 그대는 대번에 최면 상태로 들어간다. 두 눈은 제3의 눈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이렇게 되면 몸의 다른 부분으로 주의를 옮기기가 힘들어진다. 이 제3의 눈은 자석과 같다. 그래서 이 세상의 수많은 방법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 방편과 연결되어 있다. 이 방편은 집중하기 가장 간단할 뿐만 아니라 송과선 그 자체가 집중을 돕고 있는 기능이 있다. 그것은 자석과 같은 작용으로 그대의 집중력을 끌어당기고 있다.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옛 탄트라 문헌에 따르면 집중은 제3의 눈에게 있어서 음식이라고 한다. 제3의 눈은 배가 고프다. 몇 생 동안을 굶주려 왔다. 그대가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굶주렸던 것이다. 그대의 집중력을 제3의 눈에 기울이게 되면 그곳은 되살아나게 된다. 그곳에 음식이 주어진다. 집중력이 제3의 눈에 있어서 음식인 것이다. 한번 그대가 거기에 집중하고 나면 그때부터 집중은 어렵지 않다 제3의 눈 그 자체에 의해서 끌어당겨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처음에 정확한 지점을 아는 것이다.

먼저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두 눈의 시선을 모아 두 눈썹 한가운데로 옮겨가라. 그리고 바로 그 중앙점을 느껴라. 그대의 시선이 중앙점 부근으로 이동하게 되면 두 눈은 고정될 것이다. 두 눈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대는 정확한 지점을 포착한 것이다.

"두 눈썹 사이에 집중하라.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그대의 집중력이 정확한 지점에 꽂혔을 때,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 앞에서 사념의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사념의 구름들을 주시하는 주시자이다. 한번만 이렇게 제3의 눈에 고정되면 그대는 더 이상 사념에 휩쓸려 다니는 노예가 아니다. 그대는 사념을 지켜보는 주시자가 되는 것이다.

보통 그대는 주시자가 아니라 사념과 하나가 된다. 화가 날 때 그대는 화가 된다. 성(性)속에 있을 때 그대는 성이 된다. 욕망 속에 있을 때 그대는 욕망이 된다. 어떤 사념이 그대를 찾아와도 그대는 그 사념이 된다. 그대와 사념 사이에 어떤 간격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대가 제3의 눈에 한번 집중하게 되면 그때는 사념의 주시자가 될 것이다. 제3의 눈을 통해서 그대는 사념들을 구경할 수 있다. 오가는 군중들을 구경하듯이 그대는 사념의 이동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창문을 통해서 길거리의 사람을 볼 때 그대는 자신을 그 사람들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멀리 떨어져 하나의 방관자로 남는다. 여기 분노가 있다. 이제 그대는 분노를 볼 수 있다 분노를 하나의 사물처럼 볼 수 있다. 이제 그대는 '나는 지금 화가 났다'라고 느낀다. 그대는 '화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더 이상 화내는 자가 아닐 때 분노는 그 힘을 잃는다. 분노는 그대를 침범하거나 정복하지 못한다. 분노의 바람이 제 스스로 불어왔다가 불어갈 뿐,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고요히 남아 있다.

이 방편은 '주시자'를 발견하는 테크닉이다. 이제 그대는 사념들을 구경하라. 그 사념들과 만나라.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에 고정될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그대는 주시자가 된다. 그대의 몸에 통증이 일어날 때 이를 주시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을 그대 자신이라고 여기지 말라. 동일시하지 말고 방관자. 주시자가 되라. 그대가 주시하게 되면 그대의 의식은 제3의 눈에 고정될 것이다.

둘째, 그 역 또한 성립된다. 그대가 제3의 눈에 의식을 고정시킴으로써 그대는 주시할 수 있다. 그대는 사념들을 지켜볼 수 있다. 그 기로 호흡의 미묘한 진동을 느낄 수 있다. 호흡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먼저 호흡의 정수(The essence of breathing)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호흡을 할 때 공기로써만 호흡하지 않는다. 의학은 말한다. '우리는 공기를 통해서 호흡을 한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선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공기는 단지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공기를 통해서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라는 매개체에 실려오는 기(氣)에 의해서 호흡한다.'

도대체 기라는 존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과학은 아직까지 그것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몇 사람의 연구가들은 공기 이상의 신비스러운 어떤 것을 느꼈다. 호흡은 공기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매우 미묘해서 느끼기 힘들다. 이것들은 비물질적 존재다. 공기는 물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미묘한 어떤 것이, 비물질적 어떤 것이 공기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다.

잘 집중하게 되면 그것의 느낌을 느낄 수 있다. 활기에 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대 속에서도 생명력이 넘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아픈 사람과 같이 있을 때에는 그대 속에서 뭔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같이 느낀다. 병원에 한번 가보라. 단순한 문병 일로 갔음에도 그대는 피로를 느낀다. 그것은 그대의 생명력이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의 공기는 생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병원에 가게 되면 그대의 기는 그들에게로 흘러나가 버린다.

그리고 많은 인파 속에 있을 때 왜 그렇게 숨이 막히는가? 역시 그대의 생기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숲 속에 가보라. 그대 속에서 생명력이, 기가 넘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기가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 필요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기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공기는 땅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기는 아무리 깊은 땅속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이를 안다면 매개체(공기)가 필요없이 그대는 기와 직접 연결 될 수 있다. 그러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라도 땅속에서 삼매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제3의 눈에 집중함으로써 그대는 호흡이 아니라 호흡의 정수, 즉 기를 느낄 수 있다. 이 기를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로 가득 차게 하라.'
호흡의 정수를, 기를 느낄 때 정수리까지 가득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으로 모여들 때 이는 가능하다. 그대 머리 전체가 이 호흡의 정수로 가득 채워진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상상하는 순간 호흡의 정수는 실제로 사하스라라 챠크라에까지 넘치게 된다. 그 다음 호흡의 정이 빛이 쏟아지듯 정수리로부터 쏟아지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호흡의 정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 빛의 샤워 밑에 있을 때 그대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내적인 재탄생의 의미이다.

제3의 눈에 집중하게 되면 그대의 상상력은 하나의 파워를 갖게 된다. 이 테크닉을 수련하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의 상태가 순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이 순수는 일반적 순수의 개념과는 다르다. 제3의 눈에 집중하기 전에 그대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을 때 그대의 상상력은 위험하다. 그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모두 위험하다. 최면에 걸린 사람을 보라. 그는 무엇이든지 명령만 들으면 즉시 행동에 옮긴다. 명령이 좋든, 나쁘든, 불합리하든 그런 것과 관계없이 그는 명령을 따를 것이다. 이 제3의 눈 명상법은 모든 최면술의 기본이다. 제3의 눈에 있어서는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둘이 아니다. 이 때문에 우선 먼저 순수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성은 언제나 영원히 이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기에 신성이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화되는 것이다. 그대 역시 이 제3의 눈에 집중하면 그대가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화될 것이다.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꿈이 현실화되듯이 이 현실 전체가 그대로 꿈이 될 것이다. 꿈과 현실은 근본적으로 같다. "이 세상은 환영이다. 꿈이다."라고 성현들이 말했을 때 이 말은 단지 이론적인 주장이나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는 구체적인 경험이다.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의 내면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을 때 기가 아침 햇살처럼 그대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 상상만으로 기의 이 충만은 그대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집중은 한 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은 사색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한 점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으로 하여금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이 미친 사람처럼 날뛴다. 그리고 사색에서는 미친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일정한 방향으로 한길로만 가는 것이다 그는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집중 속에서는 마음이 아예 움직이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리고 사색 속에서는 그리고 집중 속에서는 아예 마음이 움직일 수 없다. 오직 한 점에만 머물러야 한다. 모든 에너지가 그 한 점에 모인다. 마음이 일정한 곳만 가도록 되어 있다.

궁을 수련은 집중과 연관되어 있다. 사념이나 사색의 마음은 제3의 눈을 통해 한 점에 집중할 수 있다. 그때 명상이 일어난다. 명상은 마음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그것은 무심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네 단계가 있다. 사념, 사색, 집중,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상이다. 명상은 집중의 상태로 만족하지 않는다. 마음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따라서 명상은 마음에 의해서 이해되어질 수 없다. 집중까지는 마음이 도달할 수 있다. 마음은 집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을 이해할 수는 없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명상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집중 속에서는 한 점에서라도 마음이 머물 수 있지만 명상에서는 그 한 점마저 사라져야 한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에게 모든 방향이 열려 있다. 그리고 사색 속에서는 오직 한쪽 방향으로만 열려 있다. 집중 속에서는 방향이 없다. 오직 한 점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명상 속에서는 그 한 점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마음은 존재할 수 없다. 명상은 마음의 죽음, 마음의 자살이다. 자살은 스스로만이 할 수 있다. 명상 역시 수행을 통하여 스스로 체득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 오 쇼 --
출처 : 국제 스트랩 스마일 요가
글쓴이 : ♡요가도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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