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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인 도 India

인도여행/인도역사 - 이제 보는 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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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알고 싶어서...

이렇게 자료를 모아봅니다.

 

인도의 역사

 

 

BC 2500년 - 인더스 문명의 시작, 문명의 주인인 드라비디언족은 현재 파키스탄 땅인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지에 놀랄 만한 유적을 넘겨놓고 있음.

 

BC 1500년 - 우리가 흔히 아리아인들의 침입이라 불리 우는 아리아인들의 이동시작,

이들의 이동은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져 점차 북인도 지역으로 넓게 확산됨.

 

BC 1000년 - 인도의 성전인 리그베다의 성립

 

 

 

 

 

BC 800년 - 브라만교 성립

 

BC 500년 - 불교의 붓다와 자이나교의 마하비라에 의한 새로운 종교운동 시작,

이보다 조금 전 시기에 브라만교를 비판한 우파니샤드들의 사상운동 시작.

 

 

BC 327년 - 알렉산더가 인도를 침입했으나 현재의 파키스탄 땅인 인더스강 조차 건너지

못함. 전형적인 서양인들의 사관 중 하나로 인도는 침입 당한 적 없음.

 

BC 273년 - 아쇼카 왕이 마우리아 왕조의 왕으로 즉위.

 

BC 261년 - 당시 마우리아 왕조와 패권을 다투던 칼링가 왕조와의 대접전.

이 사건을 계기로 아쇼카 불교로 개종.

 

 

AD 1세기경 - 불교 중국에 전파

 

15년 - 쿠샨 왕조 시작

 

52년 - 도마에 의한 예수교 전파, 케랄라에 상륙한 그는 72년까지 선교하다 남인도의 마드라스에서 사망, 현재 마드라스에는 그의 순교지와 그의 무덤에 교회가 조성되어 있음.

 

130년 - 간다라 미술 융성

 

300년 - 굽타왕조의 전성기, 불교국이었던 굽타왕조는 여러곳에서 대규모의 불사를 단행, 아잔타, 산치, 사르나트 등지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뀌어감.

 

400년 - 나란다에 불교대학 건설,

 

500년 - 힌두교 창시

 

570년 - 마호메트 탄생, 인도史와는 관련 없지만 후일 인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이슬람교 창시자의 탄생이라 기록함.

 

610년 - 이슬람교 창시

 

622년 - 마호메트 헤지라(이슬람력의 원년)

 

646년 - 당나라 헌장의 '대당서역기'편찬

 

671년 - 당의 의정, 불교를 구하러 인도로.......

 

700년대 - 엘로라의 석굴 조성

 

900년대 - 남인도의 촐라왕조 강성, 동남아지역에 식민지 건설

 

1001년 - 아프카니스탄의 마흐무드가 회교권으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침략

 

1176년 - 무하메드 고리 인도침략, 부하인 꾸뜹 우드 딘을 통한 델리, 바라나시 지역 섭정

 

1192년 - 무하메드 사망, 꾸뜹 우드 딘이 델리지역의 술탄에 오름

 

1336년 - 함피에 근거지를 둔 비자야나가르 왕조 시작,

 

1398년 - 사마르칸드에서 흥기한 티무르에 의해 델리의 술탄국과 경쟁, 티무르의 승리

 

1498년 - 바스코 다가마가 께랄라에 상륙, 이후 1510년 포르투갈의 고아장악,

고아 포루투갈 시대는 이후 1961년까지 지속

 

1526년 - 무굴제국 건설(~1858)

 

1556년 - 파테푸르시크리, 아그라 포트 등에 인상적인 건축을 남긴 악바르가

무굴제국의 제위에 오름.(~1605)

 

1565년 - 5개국 회교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비자야나가르 왕조 멸망,

수도였던 함피는 최근까지 잊혀졌던 도시가 됨.

 

1600년 - 영국에 의해 동인도 회사 설립

 

1605년 - 제항기르 무굴의 황제에 오름(~1627) 이때 카쉬미르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

 

1612년 - 동인도 회사의 무역소사 구자라트에 설립

 

1627년 - 샤 자한 무굴제국의 황제에 오름.(~1666)타지마할, 아그라포트 중축,

델리의 레드 포트, 자미 마스지드등을 남긴 건축광의 시대

 

1632년 - 타지마할 건립

 

1639년 - 동인도회사 샤자한의 허락으로 마드라스(현재 이름 첸나이)에 무역사무소 건립

 

1658년 - 샤자한의 아들 아우랑제브의 반란으로 그에게 제위가 넘어감.

이 후 샤자한은 아그라 포트에서 8년간 갇힌 후 세상을 떠남

 

1668년 - 동인도 회사 캘커타 무역소 개설

 

1690년 - 동인도 회사 뭄바이에 무역소 개설. 비슷한 시기 프랑스, 네덜란드 등도 인도 침략 구체화

 

1756년 - 뱅갈의 회교군주 나왑의 캘커타 동인도 회사 공격, 영국인 몰살 사건 발생.

이 사건을 계기로 인도와 영국의 전쟁이 본격화한다.

 

1800년대 초 - 영국지배의 본격화

 

1857년 - 델리 인근의 미루트에서 영국통치에 대한 저항운동이 최초로 시작(세포이의 항쟁)

 

1858년 - 무굴제국 멸망

 

1877년 -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황제직까지 겸임, 브리티시 인디아 시대의 개막

 

1885년 - 인도 국민회의 창설

 

1906년 - 스와데시, 스와라지 운동 시작

1911년 - 저항의 거점이던 캘커타에서 뉴델리로 수도를 옮김

1915년 -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명성을 높이던 간디가 귀국하여 국민회의에 합류,

간디의 독립운동 시작.

1919년 - 암리차르에서 집회를 하던 인도인들에게 영국정부가 명령의 신성함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우스운 이유로 발포

1920년 - 간디에 의한 시민불복종운동 시작(샤타그라하)

1923년 - 모헨조다로의 유적이 우연한 계기에 발견

1945년 8.15 - 2차 대전 종전

1947년 - 힌두권의 네루를 수상으로 한 인도와 회교권의 무하마드 알리 진나를 대로 한

파키스탄으로 나라가 나뉨. 이로 인해 두 종교세력간의 분쟁,

약 50만 명의 사상자가 남.

1948년 1월 30일 - 간디, 힌두교 광신자에 의해 암살

1950년 - 공화국으로의 인도헌법 성립, 네루의 제3세계 단결 

1959년 - 달라이 라마 인도 망명, 다름살라에 망명정부 수립

1962년 - 중국과 전쟁, 영토를 빼앗김

1965년 - 파키스탄과 전쟁

1966년 -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 정계투신, 수상이 됨

1971년 - 파키스탄과 2차 전쟁, 동파키스탄 방글라데쉬로 독립

1974년 - 인도 핵실험

1975년 - 인디라 간디, 한국의 유신과 비슷한 긴급조치 발동

1977년 - 30% 문맹의 인도국민, 인디라 독재정권 선거로 거부

1980년 - 인디라 간디, 당시 집권당인 자나타 파티의 준열을 틈타 다시 수상에 오름,

그해 인디라 간디의 아들인 산자이 간디가 의문의 죽음을 당함

1984년 - 시크교의 분리독립운동에 인디라 간디 발포명령을 내려 탱크까지 동원해 시위대 해산. 4개월 후 시크교도인 자신의 경호원에게 인디라 간디 암살. 이 사건계기로 인도북부 전역에서 힌두교인들이 시크교도 학살. 인디라 간디의 큰아들 라지브 간디 동정에 힘입어 수상에 오름

1990년 - 라지브간디, 부패로 인해 실각, 자나타 달의 뷔 피 싱이 수상에 오르나, 신분제 차별 철폐를 위한 예약제 강화공약 이행을 위해 노력하다 상층 카스트의 반발로 무산돼 실각

1992년 - 마드라스(현 첸나이)에서 선거유세를 하던 라지브 간디 타밀 타이거에 의해 암살. 나라심하 라오가 수상에 올랐고, 힌두교와 회교간의 분쟁인 아요디야 사태 발생

1994년 - 라오 수상의 인도개방 정책시작. 이후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경제발전

 

 성회지 정보

- 차례 -

1. 인도(India)는 어떤 나라인가?

2. 인도(India)의 역사
3. 인도(India)의 종교
4. 인도(India)의 기독교 선교 Report
5. 인도(India) 관련 사이트
 2. 인도의 역사

 (2-1) 인더스 문명 (기원전 3000-2000)

인도에는 두개의 큰 강이 대륙을 관통하고 있음. 히말라야에서 발원하는 갠지스강(강가강)은 동부 인도로 흘러서 벵갈만으로 빠져나가고 인더스강은 서부(현재 파키스탄 영토)를 거쳐 아라비아해로 빠져나감.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기원전 3,000~2,500년경부터 약 500년간 번성한 고대 문명을 일컬음. 인더스 문명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등에 유적을 남기고 있는데, 유적을 통해 본 문명의 수준은 메소포타미아, 수메리아 등에 버금가는 세련된 문화였던 것으로 여겨짐.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는 질서정연하게 도시계획이 된 고대 도시로서, 벽돌로 이루어진 가옥과 도로, 하수시설 등이 발달된 도시였음. 인더스 문명은 고도로 발달된 후기 청동기 문명의 단계로, 종교는 다신교였으며 정치 체제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체제였음.

인더스강 유역의 최초의 주민은 프로토오스트랄로이드(버마, 말레이계 인종)로서 검은 피부와 납작한 코를 가진 중간 키의 인종임.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문명을 일으킨 인종은 드라비다임. 그들은 그리스, 소아시아에서 이주해 왔음.

 (2-2) 아리안 문화 (기원전 2000-1000)

인도 문화의 원형은 상당부분 아리안족이 인도 대륙을 침입하여 정착하면서 이루어졌음.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이었으나, 기원전 5,000년전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하여 수세기간 정착한후, 다시 각 지역으로 이동하였음. 인도에 이주한 아리안인은 페르시아에 정착해있던 부족으로서 인도-이란인이라고 함. 이들은 기원전 2000-1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 침입, 드라비다인을 정복하였음.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인들은 처음에는 펀잡지역에 정착하다가 서서히 갠지스강 유역을 따라서 동부로 옮겨가서 기원전 800년에는 벵갈지역까지 이동하였으며, 정복민족으로서 카스트의 상층부를 형성함.

인도의 계급은 크게 (1) 승려 및 사제계급인 브라만, (2) 전사.지배계급인 크샤트리아, (3) 상인계급인 바이샤, (4) 노예계급인 수드라, (5) 불가촉천민으로 나누어짐. 이러한 것은 마누(Manu) 법전에 명기된 이래 전통적 관습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근대화를 제약하는 악습이 되고 있음.

아리안 문화의 특징은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신을 찬양하고 경건히 예배드리는 의식이 발달하였다는 것임. 특히 신에게 제사드리는 의식을 담당한 사제 계급인 브라만을 중심으로 제사 의식과 신에 대한 찬양 등이 집대성된 베다문화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음.

베다에는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 등이 있으나,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리그베다임. 나머지 베다들이 주로 제사의식의 형식에 관한 내용들인데 비해 리그베다는 신에 대한 찬가일뿐 아니라 인간성의 작용, 세계의 근원과 천지창조 등에 관한 철학적 사고를 망라한 인류 최초의 문학적 성전이라 할 수 있음. 베다 시대(기원전 1500-600)에 이어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푸라나등 경전에 입각한 힌두교가 발생함.

 (2-3) 도시국가의 형성

펀잡 지역에서 갠지스강 유역으로 진출한 아리안인들은 서서히 도시국가를 형성하여 기원전 7세기경에 이르면 이미 상당한 세력을 지닌 도시국가들이 생겨남.

이 당시의 국가형태는 부족연맹과 전제왕권의 중간형태를 취하고 있음. 거의 모든 국가는 본질적으로 부족연맹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원시적인 공화 정치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왕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음. 당시에 유명한 국가들은 거의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특히 유명한 나라들로는 코살라, 비데하, 카시, 마가다, 앙가, 아반티 등임. 기원전 7세기에 이르러 인도 북부에는 코살라, 중부에는 마가다, 남부에는 비데하 등이 중심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서로 각축하게 됨. 도시국가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정복전쟁을 야기했고 약육강식의 전쟁은 기원전 4세기경까지 이어짐.

이 정복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이는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BC 582 - 554) 대왕이었는데, 그는 주변의 소국들을 차츰 합병하고 내치를 공고히 함으로써 대제국의 기반을 닦았음. 그의 아들 아자타 사트루는 부왕의 뒤를 이어 카시, 코살라, 비데하 등을 차례로 정복하여 명실공히 인도 대륙의 강자로 부상하였음. 마가다 왕국은 알렉산더의 침입 때까지 난다 왕조와 더불어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였음. 기원전 500년경 불교 및 자이나교가 발생함.

 (2-4) 마우리아 제국

마가다국의 크샤트리아 계급출신인 찬드라 굽타는 기원전 321년 난다 왕조를 멸망시키고 마우리아 왕조를 건립,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는 벵갈만에 이르는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왕국을 건설함. 3대왕인 아소카왕(BC 272 - 232)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남서부의 타밀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함.

아소카왕의 업적중 특기할 만한 것은 불교진흥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점인데, 특히 석가모니 사후 사라져 가는 불전을 수집, 정리하였으며 백성들에게 불교문화를 전파함은 물론, 포교사절을 서쪽으로는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 마케도니아까지, 동남쪽으로는 미얀마까지 파견하였음. 또한 스리랑카에 왕자를 보내 포교함으로써 남방불교의 중심지가 되게 함은 물론,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음.

기원전 185년 마우리아 왕조의 군사령관이었던 푸샤미트라는 마우리아 왕조를 멸망시키고 숭가왕조를 세웠으나 기원전 70년에 망함.

 (2-5) 쿠샨왕조 (AD 78-226)

AD 78년 박트리아 지방의 쿠샨족의 카니슈카왕이 서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중국의 한 왕조, 남쪽으로는 인도대륙의 중심부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으나 226년 이란지방에 기원을 둔 사산 왕조에 의해 멸망됨. 이후 인도는 많은 소국으로 분열되었으나 후에 동방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에 의해 다시 통일되게 됨. AD 100년경 대승불교가 발생함.

 (2-6) 굽타왕조 (AD380-606)

찬드라 굽타 1세가 굽타왕조를 세움. 찬드라 굽타 2세(380-413) 시대가 황금시대로서 문화적 르네상스를 구가함. 굽타왕조 초기 및 전성시대에는 불교가 융성, 말기에는 힌두교 및 자이나교가 부흥하기 시작함. 찬드라 굽타 2세 시대부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훈족등의 침입이 개시됨. 굽타왕조는 606년 훈족에 의하여 멸망함. 훈족등 중앙 아시아인은 라즈푸트인으로 가칭하면서 굽타왕조의 영토에 힌두 및 자이나교 왕국들을 세움.

 (2-7) 무굴제국 (1526-1858)

12세기 이후 이슬람의 인도 침입이 본격화되면서 1526년 티무르의 5세손 바베르에 의해 이슬람 왕국인 무굴제국이 건설됨. 그의 손자 악바르대에 이르러 데칸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대제국이 건설됨. 악바르 이후 150년간 전성시대 지속. 특히 샤 자한(1627 - 1658)과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1658-1707)시대에 이슬람교가 번성하여 오늘날 타지마할 등 이슬람 관련 유적을 많이 남김.

16세기초에는 구루 나낙이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절충, 일신교인 시크교를 창시함.

무굴제국은 이란 지역의 이슬람교도 침입, 1757년 영국과의 플라시 전투, 1857년의 세포이 반란을 거쳐 동인도 회사의 해체와 함께 1858년 영국의 직할지로 편입됨.

 

 (2-8) 반영 독립투쟁과 건국

많은 정치단체가 18세기 후반에 생겨났으나 인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중심 조직은 1885년 소집된 인도 국민회의가 맡게 되었음. 그러나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의 냉담한 반응은 국민회의파를 점차 과격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벵갈의 분리(1905년)는 전인도인들의 분노를 사 보이콧 및 스와데시 운동이 전인도로 파급되었음. 이에 대해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취하여 모슬렘과 힌두교도간 대립을 조장하였으며, 1906년에는 국민회의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모슬렘 연맹이 결성되었음.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인도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영국을 지지하면서 인도인이 영국에 적극 협조할 것을 호소하였음. 특히 바수(Basu), 진나(M.A. Jinnaj) 등 국민회의 대표들은 영국측에 대한 협조를 다짐하였음. 그리하여 막대한 수의 의용병과 군수물자가 제공되었으며, 인도 병사 120만명중 80만명이 전투요원이었음. 이러한 영국에 대한 협조는 전후 인도의 자치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음.

자치운동은 1917년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영국의 인도상 몬타규(Montagu)의 성명은 인도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았음. 그러나 1918년 1월 소위 몬타규, 쳄스퍼드 보고서가 발행되고, 이것이 1919년 인도 통치법이라는 명칭으로 공포됨으로써 인도인들을 크게 실망시켰음. 납세기준에 따라 남성의 10%만이 선거권을 갖고 여성의 참정권이 무시된 인도 통치법은 진정한 지방자치를 허락 하지 않아서 인도인의 전쟁 협조에 대한 보상으로서는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음.

이를 계기로 국민회의내의 온건파와 과격파가 9년만에 다시 대결하게 됨. 그 결과 창립이래 계속 온건파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국민회의는 1917년 이후 간디(M. Gandhi, 1869 - 1948)등이 이끄는 진보파에 의하여 완전 장악됨. 진보파인 마하트마 간디는 만약 인도가 영국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전쟁이 장기화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을 지지하였던 것인데 전후 요구대로 자치가 보장되지 않고, 오히려 1919년 2월에 발표된 로왈라트법(Rowalatt Act)에 영국정부가 인도에 대해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자, 1920년 국민회의에서 평화롭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불복종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함.

그러나 이 불복종운동은 영국 정부가 제정한 법률과 규정을 준수하지 말자는 적극적인 운동이었음.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영국 상품의 배격, 파업, 납세 거부 등 불복종운동이 벌어짐. 이에 당황한 영국정부는 향후 분리통치를 실시하겠다고 하면서 이슬람교 연맹을 회유하였으나, 이슬람 교도들은 도리어 간디와 협력하여 반영운동에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함. 이러한 힌두-이슬람교 제휴의 반영운동을 힐라파트운동(Khilafat Movement)이라 함. 이슬람 교도들은 무굴제국이 멸망한 후 칼리프의 지위를 유지해 온 터키왕을 정신적 지주로 생각해 왔었는데, 1차대전 결과 터키제국이 분열됨에 따라 영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것이 힌두-이슬람 제휴의 배경이 됨.

간디와 이슬람 교도들이 연합한 반영운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영국 정부는 반영 인도 요인들 에 대한 체포,살인을 자행하였음. 그러나 간디는 영국 정부의 강경책에 대응해서 민중들이 폭력을 사용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을 저지시키면서 비폭력의 불복종운동을 더욱 강력히 전개하였음. 1927년 마드라스에서 열린 국민회의에서 인도의 지도자들은 2년 이내에 자치령으로 승격할 것을 영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이러한 영국의 정책은 국민회의내에 과격파의 부상을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와 1929년에는 과격파 네루 (Jawaharale Nehru, 1889 - 1964)가 국민회의의 의장으로 선출 되었음. 네루는 국민회의의 유일한 목적이 독립이라고 선언하고 이를 위해 간디에게 국민회의의 전권을 위임하였으며, 이에 간디는 다시 불복종운동을 전개함.

한편 힌두측을 대표한 간디와 함께 반영 힐라파트 운동을 전개한 이슬람교 대표는 알리 형제였으나, 후일 파키스탄 분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진나(M.A. Jinna)는 처음부터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에 찬성하지 않았음. 원래 진나는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의 화합을 주선하는 등 국민회의에 성실하게 참여하였으나, 합법적이고 점진적인 영국의 정치적 개혁에 깊은 신뢰감을 갖고 있었던 진나는 국민회의의 성격이 변질되자 국민회의와 결별하고 활동 무대를 이슬람교 연맹으로 옮겨 1924년 동 연맹의 의장이 되었음.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국민회의는 인도 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으며 이에 영국은 자치령(Dominion)의 지위를 허용코자 하였으나 국민회의는 이를 거부하면서 Quit India를 요구하였음. 한편 모슬렘 연맹은 영국에 고무되어 파키스탄의 분리를 요구하였으나, 도리어 많은 모슬렘으로부터 반발을 받았음. 종전후 영국은 인도에 독립을 부여키로 결정하고, 인도, 파키스탄 분리안을 내놓음. 1946년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총선 결과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 정부가 수립됨.

애틀리(Attlee)의 영국 노동당 정부는 인도가 영연방의 일원으로 남기를 희망하면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화해를 도모하고자 각료사절단을 인도에 파견하였음.

각료사절단은 파키스탄 분리는 반대하면서도 힌두 다수의 A지역, 이슬람교 다수의 B지역, 이슬람교가 약간 우세한 C지역으로 나누는 안을 제시함. 이에 진나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음. 그러나 임시정부 구성을 놓고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 사이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는데, 이슬람교 연맹은 국민회의 대표와 이슬람교 대표의 동수를 요구하였으나 각료사절단은 이를 거부하였음. 간디는 각료사절단에 대해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으나 C지역의 형성으로 벵갈주와 아쌈주가 병합될 경우 이슬람교에 의해 전지역이 지배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태도를 바꾸었음. 네루가 다시 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46년 각료사절단의 계획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자 진나가 이를 비난함으로써 통일 인도의 마지막 가능성은 사라지게 됨. 인도 총독은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을 화해시키기 위해 간디와 네루에게 접근하여 각료사절단이 제시한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으나 거부당하였음.

한편 애틀리는 1948년 6월 이전에 인도의 정권 이양을 발표하고 이를 위해 마운트배튼 (Mountbatten)을 총독으로 임명하였음. 1947년 3월에 취임한 마운트배튼은 가능하면 더 빠른 기간안에 정권 이양을 추진하기 위해 국민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하였는데, 국민회의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네루나 파텔은 모두 인도-파키스탄의 분리에 긍정적인 입장이었으나 간디는 분리에 반대 입장을 취했음. 그후 간디의 영향력이 현저히 쇠퇴하면서 국민회의의 주도권은 네루와 파텔에게 넘어갔음. 인도의 분리와 두 자치령 탄생에 대한 마운트배튼의 분리 계획안은 모든 정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영국 정부도 이에 동의하였음.

1947년 8월 15일 약 200년 동안의 영국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인도인들의 희망은 달성되었으나 인도 대륙에서 수천년의 전통을 이어온 인도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됨. 네루는 델리에서 인도의 초대수상에 취임하였고, 진나는 카라치에서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음.

 (2-9) 독립후 정치정세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마침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각각 분리 독립함. 1950년 인도는 연방제와 민주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헌법을 채택하였고, 네루 수상이 독립이래 1964년까지 신생국 인도를 이끔. 1962년에는 중-인 국경분쟁이 일어났으며, 1965년에는 캐시미르를 둘러싸고 인-파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음.

네루수상 사망 후 20개월만에 그의 딸 인디라 간디가 수상에 취임하였고 1971년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 인도는 같은 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지원하며 성공적으로 인-파 전쟁을 수행하였고, 방글라데시의 독립으로 인도는 인도 대륙에서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음. 75년 여당의 선거 부정 혐의를 둘러싼 정치적 분규와 경제난국으로 정계가 혼란에 빠지자 간디 수상은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야당, 사법부, 언론에 통제를 가했음. 그러나 아들 산자이 간디를 등장시킨 이후 야당 탄압, 가족계획의 무리한 시행 등으로 인기를 잃어 간디 정권은 77년에 실권, 이후 모라지 데사이가 이끄는 자나타 정권이 수립됨.

자나타 정권 역시 정치적 안정을 기하지 못하고 1979년에 붕괴되었으며, 챠란싱 과도정부를 거쳐 1980년 선거를 통해 간디 수상이 재집권함. 간디 수상은 재집권 이후 제9회 아시안 게임, 제7차 비동맹 정상회담 및 영연방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인도의 대외적인 지위를 높이는데 성공하였으나, 1982년부터 시작된 시크 문제 등으로 대내적으로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던 중 1984년 6월 시크교도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골든 사원에 군대를 투입한 것이 화근이 되어 1984. 10. 31 자신의 시크 경호원에 의해 피살됨. 인디라 간디수상 피살 직후 수상으로 선출된 그녀의 장남 라지브 간디는 국민들의 동정심을 의식, 조기 총선을 선포하였으며 1984년 12월에 실시된 제 8차 총선에서 총의석 508석중 410석을 차지함으로써 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두고 1984. 12. 31일 새로운 내각을 구성함.

라지브 간디 수상은 집권이래 펀잡 문제 및 캐시미르 문제 해결, 경제개혁 등을 추진하였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또한 정부의 무기발주 구입을 둘러싼 고액의 뇌물수수 사건 등 정치 스캔들이 연속적으로 폭로되어, 라지브 간디 수상의 신뢰도 및 지도력이 약화되던 중 89. 11월 실시된 총선에서 제 1위 의석 (194석)을 차지하긴 하였으나 1984년 총선시 획득의석인 401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참패를 당하여 신정부 구성을 포기함으로써 제2위 의석을 차지한 Janata Dal당의 싱(V.P. Singh)이 수상으로 취임함.

Singh 신정부는 어느 단일 정당도 과반수를 얻지 못해 연립정부가 불가피한 현실속에 제3당인 인도 국민당 (BJP,86석), 공산당계의 CPI 및 CPM(44석)의 외곽지원을 받아 89. 11월 연립정부가 아닌 소수 단독정부로 출범함(BJP, CPI, CPM은 입각치 않음). 싱정부는 1년여의 집권기간(89. 11- 90. 11) 동안 신연방 고용정책, 힌두-회교도간 대립문제를 놓고 자신을 지원하는 인도 인민당과 마찰, BJP가 지원을 철회함으로써 사임함(90. 11). 싱 사임후 싱이 이끈 자나타달 당내의 라이벌인 찬드라 세카르가 자파세력(약 50여명의 의원) 및 국민회의당의 라지브 간디의 지원(약 200석)을 받아 1990년 11월 수상에 취임. 그러나 국민회의당과의 정치적 반목으로 세카르 수상은 취임 4개월만인 91. 3. 6 사임함. 벤카타르만 대통령은 3. 13일부로 하원(임기 5년, 정원 545석)을 해산, 과도 정부 총리에 세카르 전 총리를 임명함. 91. 5. 20 - 26간의 제10대 총선거 도중, 5. 22 라지브 간디 전수상(Congress I당 총재)이 인도 남부 마드라스시 근교 40㎞ 지점에서 피살당함.

라지브 간디의 피살은 스리랑카 타밀 분리주의자의 독립투쟁을 진정시키기 위해 스리랑카 정부와 협정을 체결, 인도 평화유지군을 파견한 것에 대한 타밀 게릴라들의 보복에 의한 것으로 알려짐.

라지브 간디의 사망으로 6. 12로 총선 연기, 선거결과 Congress I당이 총의석 506석중 223석을 획득함으로써 과반수에는 미달이나 제 1당으로 집권함. 91. 5 Congress I당내 파벌간 타협으로 Narasimha Rao 전외상이 수상 겸 Congress I당 총재로 취임.

 2. 인도의 역사

 (2-10) 제12대 총선 및 정치상황

96. 4. 27 - 5. 7간 실시된 인도 총선에서 BJP 연합이 186석을 획득, 136석에 그친 집권여당 Congress를 누르고 제1당으로 부상함(NF/LF 연합 111석, 지역정당 기타 101석).

BJP는 집권에 필요한 과반수인 268석에는 82석이 부족하였으나, 샤르마 대통령은 제1당인 BJP의 바즈파이 당수에게 조각을 권고함으로써 바즈파이 당수가 5.16 총리에 취임함.

BJP는 그동안 지역정당 및 군소정당을 대상으로 연정구성을 위한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대부분의 정당들이 힌두 원리주의자성향인 BJP에 대한 지지를 거부함에 따라, 5.31로 예정된 하원 신임투표를 앞두고 BJP 정부는 5.28 내각 총사퇴를 선언함.

이에 따라 샤르마 대통령은 5. 28, Janata Dal 주도 United Front(14개 정당 연합)의 Gowda 당수에게 조각을 권고. 고우다 당수는 국민회의당 및 공산계열 정당들의 외곽지원을 받아 6.1 총리에 취임함.

1997.4. 국민회의당의 Kesri 총재는 국민회의당이 주도하는 연정을 모색하기 위하여 United Front 연정에 대한 외곽 지원 철회를 선언. 그러나 United Front 연정은 국민회의당 주도의 연정보다는 새로운 총선을 선호함에 따라 국민회의당은 총선보다는 United Front 주도 연정을 계속 지지키로 입장 전환. 국민회의당과 United Front 연정간의 타협에 따라 Janata Dal의 I.K. Gujral 내각이 출범함.

1997.12. Jain Commission(라지브 간디 암살 조사위원회)의 임시보고서에서 DMK(Tamil Nadu주 지방 정당)의 연루 가능성 발표와 관련, 국민회의당은 DMK를 연정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 Gujral 연정이 이를 거부하자, 국민회의당이 지지를 철회함에 따라 대통령은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결정함.

1998.2-3 하원 총선 결과, BJP 및 연합정당이 252석을 획득하여 제1정당이 되었으며, 국민회의당 및 연합정당은 167석을 획득하여 제2정당이 됨.

1998.3.19. BJP 주도의 연정(AIADMK, SP 등 18개 정당 참여) 구성. 3.28. Vajpayee 내각(BJP)이 출범함.

1998.5.11 및 5.13 라자스탄주의 Pokhran에서 핵실험을 실시함.

 (2-11) 제13대 총선이후 정국동향

1999.4.17 바즈파이 내각에 대한 신임동의안이 부결(찬성 269표, 반대 270표)되어 1999.4.26 하원이 해산되고 바즈파이 과도 내각체제가 수립됨.

1999.9.5~10.3간 5단계에 나누어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BJP주도의 NDA(National Democratic Alliance)연합이 305석(이중 BJP 182석), 국민회의당 및 연합이 114석(국민회의당 112석), 좌파연합 41석, 기타정당 64석 등의 분포로 BJP주도의 NDA가 집권하게 되어 1999.10.13 바즈파이 전총리가 다시 총리에 취임함.
바즈파이 총리의 BJP를 중심으로 한 연정은 바즈파이 총리의 리더쉽으로 NDA 참가 20개 정당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며 안정기조를 유지해옴.
- 정당별 의석분포

그러나 NDA 연정은 연정구성 군소정당의 요구를 충족시켜야하는 등 연립정부로서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지니고 있어 정국불안요소가 상존하고 있음.
2001년 5월경으로 예상되는 4개주와 1개 연방관할지역(타밀나두, 웨스트벵갈, 케랄라, 아쌈주 및 폰디체리 연방관할지역) 주의회 선거를 앞두고 지역 군소 정당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이합,집산 현상이 발생하고 있음.

2001.3.13 인터넷 뉴스매체(Tehelka)에 의한 Bangaru Laxman BJP 총재 및 NDA 제휴정당 Samata Party의 Jaya Jaitly총재등의 방산구매관련 금품수수장면 공개로 Laxman BJP 총재, Jaitly Samata Party 총재, Fernandes 국방장관, Panja 외무담당국무장관(이상 Sarmata Party 지도급 인사) 등이 사임하고, Trinamool Congress당(당수 Mamata Banerjee)이 NDA를 탈퇴하는등 정치적 파문이 확산되고 있음.

< Source 8>: 주인도대사관

 More Information about India History
인도 고대사
http://kcm.co.kr/mission/map/Asia/India/
역사적인 인도 (HISTORIC INDIA)
http://comeng.andong.ac.kr/~jypark/public_html/historicindo.htm

 

 President of India : Shri Kocheril Raman Narayanan

생년월일 : 1920년 10월 27일
Married : Shrimati Usha Narayanan; 2 daughters;
출생지 : 케랄라주 우즈하부르 (the village of Uzhavoor in Kottayam district, Kerala)
주요저서 : 《현대 국제관계에서의 비동맹관계》(1981)

불가촉민으로서는 최초로 1997년 제10대 인도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21년 인도
남부 케랄라주의 우즈하부르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천한 사회적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머리가 명석하여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대학에 진학
하였다. 1943년 트라방코르대학교(지금의 케랄라대학교)에서 영어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고, 1948년 런던경제학대학에서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1943년 트라방코르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1944∼1945년 《힌두 The Hindu》와 1945년 《타임스 오브 인디아 The Times of India》에서 기자로 일하였다. 런던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는 뭄바이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사회복지 Social Welfare》의 외국특파원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인도로 귀국한 뒤 나라야난은 영국의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키 교수의 추천으로 자와할랄 네루 인도총리에게 등용되어 1949년 외무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양곤·도쿄·런던·캔버라·하노이 등 세계 각지를 돌며 외교관으로 탁월한 경력을 쌓았으며, 1967∼1969년 타이 대사, 1973∼1975년 터키 대사, 1976∼1978년 중국 대사 등을 지냈다. 특히 중국에서 그는 인도와 중국 간의 15년에 걸친 외교상의 알력을 해소하는 데 힘써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공헌하였고, 또한 인도와 미국의 관계가 경색되었던 시기인 1980∼1983년에 미국 대사를 맡기도 했다.

1979년 자와할랄네루대학교의 부총장을 지내기도 한 나라야난은 1984년 이후 하원(로크사바)에 진출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는 여러 각료직을 거쳐 1992년 부통령에 선출되었고 1997년 7월 25일 제10대 인도 대통령에 취임하였는데, 인도 세습계급제도인 카스트제도의 최하층 계급인 불가촉민이 최초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의 당선은 사회적·정치적으로 민주화된 인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주요 저서로 《현대 국제관계에서의 비동맹관계 Non-Alignment in Contemporary International Relations》(1981), 《인도와 미국에 대한 이해 India and America:Essays in Understanding》(1984) 등 인도 정치와 국제관계에 관한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Source 9>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Inidan Parliament Home Page

 간디 (Mahatma Karamchand Gandhi) - 1868. 10.2 ~1948.1.30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활동분야 : 사상, 민족운동
출생지 :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
주요저서 : 《인도의 자치(自治)》

서부의 포르반다르 출생.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 1887년 18세 때 런던에 유학하여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하여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1년간의 계약으로 부인과 함께 남(南)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그는 거기에 사는 인도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투쟁단체를 조직, 1914년까지 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 동안 진리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하였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 아힝사(ahi涵 s嚆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를 중심으로 하는 간디주의를 형성하였다. 간디 자신이 전개한 인종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사티아그라하:satyagraha) 및 자기실현을 위한 인격의 도야와 수양(修養)의 노력은 어느 것이나 훗날 간디가 인도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의 모형이 되었고, 또한 아슈라마(嚆飽 rama:修道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도인의 정신개조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최초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1906년 아시아인 등록법을 제정한 트란스발주(州)에서 일어났다.

이 투쟁은 그로부터 약 8년 동안 인두세(人頭稅)를 비롯한 여러 차별법에 반대하기 위하여 계속되었으며, 남아프리카의 여러 주로 퍼져나갔다. 특히 1913년에 44세가 된 간디가 선두에 서서 행진한 나탈주(州)에서 트란스발주까지의 '사티아그라하 행진'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간디를 비롯한 행진 참가자 4,000명은 남아프리카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악법을 반대하는 주장은 세계적 여론의 동정을 모아 당국을 굴복시켰다. 결국 아시아인 구제법이 제정되어 인도인에 대한 차별법은 모두 폐지되기에 이르렀으며, 이 투쟁으로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간디에서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명을 다한 간디는 1915년에 귀국하였는데, 정치운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토지분쟁의 해결 등에 노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전쟁 후 영국의 배신과 1919년의 롤라트 법안(Rowlatt Act)과 같은 반란진압조령(條令)의 시행 때문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인도 여러 곳을 두루 순회하였고 수방(手紡:charkha)운동을 장려하였다. 1919년 인도국민회의파의 연차대회에서는 간디의 지도 하에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 방침이 채택, 납세거부·취업거부·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을 실시하였다. 이듬해에 반영·비협력 운동이 선언되고 외국제 직물의 불매운동은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 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 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인도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수방운동으로써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소금세 신설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구금되었으며, 1931년 석방 후, 어윈 총독과 절충한 결과, 간디어윈 협정을 체결하여 반영(反英) 불복종운동을 중지하였다. 간디어윈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한 인도는 완전독립의 약속을 얻어 내려고 노력하였으나, 상반된 이해관계로 타결을 보지 못하고, 1942년의 봄베이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영국세력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여 공전의 대규모 반영불복종운동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전쟁 후에는 인도를 하나의 감옥으로 보고 전화(戰禍)와 굶주림으로 거칠어진 인심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기 위하여 인도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힌두·이슬람의 화해에 따른 인도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주권을 넘겨줌에 있어서 인도의 대정당인 국민회의파와 전인도(全印度) 이슬람 연맹이 인도를 둘로 분할 독립할 것을 협정한 결과 오히려 격렬한 힌두·이슬람의 대립소동이 벌어졌다.

1947년 7월 인도가 이러한 분란 속에서 분할 독립했을 때, 간디의 나이는 78세였으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동이 가장 격화되어 있던 벵갈에서 힌두·이슬람의 융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듬해인 1948년 l월, 이 활동의 행선지를 뉴델리로 연장, 뉴델리의 소요를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1월 30일 반(反)이슬람 극우파인 한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R.타고르의 방문을 받아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고, 그 후로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의 위대한 영혼은 인도민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폭력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나, 인도에 있어서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디의 주저 《인도의 자치(自治)》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서구사상(反西歐思想)은 그의 단편적인 편모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평화사상과 평화에 바친 업적은 실천면에서 볼 때 민주적 민족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며, 특히 비폭력·무저항주의는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Sources 10>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ngaged Buddhist Dharma Page, LifeArt Productions

 3. 인도의 종교

'종교의 나라'로 불리우는 인도는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 시트교의 발상지이며, 수세기에 걸친 회교도 및 영국의 지배에서 회교와 기독교가 전파되어 각종 종교가 공존해 왔다.

힌두교 이외에도 이슬람교, 기독교,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가 소수종교로서 인도인의 생활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인구대비 분포비율은 힌두교 81.5%, 회교 11.2%, 시크교 2.4%, 기독교 2.7%, 불교 0.7%, 자이나교 1%로서, 힌두교가 압도적이며 이중 회교와 기독교는 외래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인도에서 기원한 불교와 자이나교, 힌두교, 시크교의 4종교 가운데 불교는 기독교와 같이 세계종교로서 발전하였다. 힌두교는 오늘날 인도 인구 가운데 80%이상의 추종자를 갖고 있는 가장 큰 종교로서 기원전 1500년경 인도 대륙에 침입하기 시작한 아리안들의 종교인 브라만교가 민간신앙을 흡수, 대중화한 것이다.

 (3-1) 힌두교

힌두교의 원어는 Hinduism으로 Hindu란 '큰 강'을 뜻하는 Sindhu의 페르시아 발음이며 인더스(Indus), 인디아(India)라는 어휘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원적으로는 북서 인도의 강 이름, 혹은 강주변의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었으나, 후대에 외서 힌두스탄이나 인디아와 같이 인도전체를 나타내는 말로 전이되었다. 그러므로 어의적으로 볼 때 힌두이즘은 인도교, 즉 인도에서 발생하여 성장한 모든 종교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힌두교라고 할 때는 '베다'의 권위와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는 비정통적인 자이나교와 불교를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킨다.

힌두교는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나 혼합주의, 혹은 뉴에이지 운동을 통해 파고들고 있다.

A. 힌두교의 특징

힌두교는 넓은 의미로는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종교의 하나로 특정한 교조나 교리, 중앙집권적 권위나 위계조직이 없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신앙형태가 융합된 종교여서 간단히 정의 내리기가 매우 어렵다. 힌두교 안에는 원시적인 물신숭배, 애니미즘, 정령숭배로부터 주술, 제식, 다신교, 일신교, 고행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고도로 발달된 사변적 체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형태의 종교가 발견된다. 힌두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며 덜 배타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힌두교는 하나의 종교일 뿐 아니라 힌두의 사회, 관습, 전통 등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로 힌두의 생활방식이자 힌두문화의 총체이다.

B. 힌두교의 신들

힌두교 신중에서 최고의 신으로 숭배받는 신들은 창조의신 브라마와 유지의 신 비쉬누, 파괴의 신 쉬바의 3신이다.

① 브라마(Brahma) : 브라만의 주신(主神)으로 본래 기도의 주 였는데 점차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브라마신은 힌두사원에서 볼 수 있듯이 얼굴도 넷이고, 팔도 넷이다.

② 비쉬누(Vishnu) : 힌두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신, 세계를 세걸음으로 답파하는 유지신, 또는 태양신으로 숭상된다. 비쉬누은 열가지 모양으로 변신한다.

③ 쉬바(Shiva) : 파괴의 신이며, 공포의 대상이다. 힌두는 그에게 사람이나 짐승의 희생제를 바치며 그 노여움을 진정시키고 재액을 막으려 한다. 손에는 창과 도끼, 해골, 뱀장식을 하고 화장터에서 시체를 재를 바르고 춤춘다.

④ 샥티(Shakti) : 힌두신에게는 각각 샥티(여신, 애욕)가 주어졌다. 탄트라교(밀교)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시대에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탄트라는 본질적으로 요가적 수단에 의해 초월적 힘을 획득하고, 최고의 원리와 합일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티벳에 전해져 티벳 불교가 되고, 나중에 몽골에 전해져 라마교가 되었다.

C. 힌두교의 구원관

(1) 구원의 길

가. 행위의 길 - 카르마(업보)를 생성시키는 것은 욕망이다. 그러므로 결과에 대한 이기적 집착심이 없는 의무의 수행은 과보를 낳지 않으며, 따라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고행, 희생제, 정화의식, 베다낭송 등으로 표현된다.

나. 명상의 길 - 지식(지냐나)의 길로 참다운 자아는 육체나 감관이나 사고 등이 아니라 영원불멸하는 아트만이며, 이것은 브라만과 동일하다는 직관적 통찰에 이른다. 자기 신격화의 방법이다.

다. 봉헌의 길 -신애(박애)의 길로 인격신(비슈누 또는 시바)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길이다. 인격신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과 복종이며, 상호융합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힌두교도에게 힌두교란 심원한 교리나 해탈의 실현보다는 전통적인 종교적 관행, 의식, 규정을 준수함으로써 현세에서 행복을 얻고, 내세에서 좋은 곳에 태어나는 길이다.

(2) 구원수행 기법(요가) : 정신을 통일하여 의식을 더럽히는 산란한 마음이나 습관적인 행동을 일소라는 것을 말한다.

 

D. 힌두교의 주요개념과 의식

다양한 형태를 지닌 힌두교이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공통된 특성과 핵심 사상을 찾을 수 있다.

(1) 아트만-브라만의 교설 : 영원불변하고, 전우주의 근원이자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이라는 중성적 원리가 있으며, 이것은 곧 인간 내면의 참다운 자아, 즉 아트만과 동일하다. 브라만 자체는 무속성이며 비인격적이지만 비슈누, 시바라는 인격적 최고신으로 나타날 수 있다.

(2) 아힘사(不殺生) : 모든 생명의 근본적 단일성에 근거한 생명에 대한 존중을 내용으로 하는 아힘사는 채식주의, 소의 도살 금지 등으로 표현되었다.

(3) 윤회와 업(카르마), 해탈 :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현재의 삶은 반드시 과거의 행위의 결과라는 업설은 생사의 반복적 순환, 즉 윤회사상과 연관된다.

★삼사라(Samsara, 輪廻) : 인간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생명은 그것의 업보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상태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끝없는 윤회를 거듭하면서 모든 영혼은 전생의 업보에 따라 어떤 한 가지 존재 형태로부터 다른 존재 형태로 계속 옮겨간다고 생각한다.

★모크샤(moksah, 해탈(解脫)) : 모든 힌두교도의 목적은 삼사라(윤회)의 바퀴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고 카르마(업보) 자체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이런 범주에서 구원이란 모든 힌두교도의 사고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전제 조건이 된다. 따라서 해탈이란 업보의 굴레로부터 인간의 영혼이 해방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4) 암소 숭배 : 힌두교도들은 오랜 옛날부터 암소에 대하여 경의를 품고 있었다. 암소가 위대한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 왔다.

(5) 힌두교의 예배의식

가. 신전예배 : 먼저 신자는 정결의식을 행한다. 발과 입을 씻고, 목욕, 정결한 옷, 향수, 경전찬양, 향을 태움, 종교의식 음악이 연주됨. 대표되는 신에게 먼저 경배하고 제물을 드리고 기도함, 다른 신들을 순회하며 기원.

나. 가정 : 가정제단 푸자(Puja)를 중시한다. 힌두교도는 하루 세 번씩 제사를 드린다.

다. 축제 : 힌두의 축제는 부정의 정화, 해로운 세력의 저지, 사회의 갱신, 위기의 극복, 자연의 활력을 재생시키는 등의 목적을 가지고 행해진다. 홀리(Holi)는 봄축제로서 크리쉬나를 경배하며, 즐기는 것이 강조된다. 디발리(Divali)는 가을축제(신년축제)로서 쉬바의 여신이 칼리에게 제사드린다.

E. 힌두교와 기독교의 세계관 비교
주제 힌두교적 관점 기독교적 관점
창조주와 자연의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은 하나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엄격히 구분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신 인격화, 하나안에 모든 것, 다양한 형태 인격, 자기계시, 단일신
시간 순환, 시간은 끝이 없다. 역사는 의미가 거의 없다 직선, 시작과 끝이 있다.역사는 의미가 있다
인생 영혼의 윤회, 환생 인간은 독특한 존재, 인생은 오직 한번뿐
장래 합일될 때까지 환생 부활
경전 없음, 그러나 베다와 베가받기타가 경전처엄 쓰임, 힌두교는 거의 모든 종교의 경전을 사용함 성경
해결 요가: 스스로를 구원하라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회개와 믿음으로 받음
구원의 대행자 화신 (Avatars) 그리스도: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
종교 지도자들의 위치 구루(Guru)의 가르침을 따름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
독특성 힌두에는 신에 이르는 많은 길이 있다. 예수는 많은 위대한 스승중에 한 분이다 기독교에는 오직 한분 하나님이 계신다.예수그리스도는 유일하신 분이다
묵상, 기도 초점이 없음 비실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춤 실체

F. 힌두교 평가

불평등한 사회관을 가지며, 종교혼합주의로 용광로 혹은 늪과 같으며, 숙명론적 결정주의이다. 또 역사의식과 도덕성, 문화적 사명이 결여되어 있고, 비합리적 풍속과 습관을 숭상한다.

G. 힌두교권 선교전략

1) 장애요소

소고기 먹는 것, 비인도적 기독교 예배방식, 교회의 남녀학생이 섞여서 활동하는 것, 기독교가 이마에 주홍색 점찍는 것을 반대하는 것, 기독교가 외국종교로 인식되는 것, 기독교가 인도문화와 정체성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인식, 기독교는 애국적이 아니다라는 생각, 기독교는 불가촉천민의 종교이다, 카스트는 사회안전의 보루이다.

2) 가능한 전략

① 가족단위와 부족단위의 선교 ② 토착화 전략 ③ 자립원리의 강조 ④ 선교사의 인격과 절제생활 ⑤ 선교메세지의 접촉점을 찾으라


<Sources 11> : 주인도대사관 / 인도의 미전도종족 미나의 홈페이지 / 인도로 가는 길(주)

 3. 인도의 종교

 (3-2) 이슬람교

인도 최대의 소수파인 이슬람교는, 같은 나라에서 종교의 이유로 갈린 파키스탄과 인도와의 관계가 좋지 않듯 현재 인도내에서도 주류인 힌두교도들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만은 않은 집단들이다. AD590년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 땅인 메카에서 태어난 마호메트에 의해 창시된 회교는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우듯 '한손엔 칼, 한손엔 코란'이라는 말로 유명한 종교이다. 물론 이런 말들은 이슬람권과 대립하던 기독교권이 만들어낸 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하튼 회교가 그다지 개방적이거나 관용적인 종교는 아니다.

1001년 마흐무드의 인도침입으로 시작된 이슬람세력의 인도침입은 결국 1527년 무굴제국이 성립되면서 최정점에 이르는데, 이 500여년 간의 이슬람세력과의 대립(대부분 힌두들이 엄청 깨진....)과 이슬람 지배자들의 포교 정책에도 불구하고 회교 인구가 아직까지도 소수인 것은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무굴제국이 망하고 그 자리를 영국이 차지하게 되면서 끊임없는 종교간의 분리 대립정책을 구사했는데, 오늘날과 같은 극단적 대립의 시초는 이 영국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독립후 결국 나라는 힌두국가인 인도와 이슬람국인 파키스탄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 분할 과정에서 현재 분쟁지역이 카쉬미르 사태의 시원이 되고 만다.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 분할의 기준은 해당지역 종교당 인구비례였는데, 카쉬미르 지역은 주민의 대다수가 회교신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카쉬미르 주민쪽으로 가지 않았다. 당시 카쉬미르는 영국땅이 아닌 독립된 왕국이었는데, 카쉬미르의 마하라자(왕) 은 힌두였다. 결국 그는 인도,파키스탄의 독립과정에서 대다수 주민의 바램을 무시하고 인도를 선택하였다. 이런 저런 종교갈등이 복합적으로 터지게 된 것이 요즘에도 시끌시끌한 카쉬미르 지역의 분쟁이다. 실제로 카쉬미르에 가서 그곳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처음에는 조심스럽지만, 결국 그들의 얘기는 우리는 인도보다는 파키스탄과 가깝다는 것이다. 인도가 누리고 싶어하는 남아시아의 패권에 죽어나는 것은 소수파이고, 소수민족들일뿐이다.

회교는 수많은 남자들이 열광하듯 일부다처제이고(실제로 일부다처를 누리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오히려 있는 사람들이 여자들을 싹 쓸어간 관계로 장가못간 남자들이 많다. 이런 여자의 부족은 이슬람 권에서의 광범위한 동성애 관행을 낳았다.) 돼지고기를 제외한 모든 육류를 섭취할수 있다. (단 이들의 제사방식인 '할랄'이라는 의식을 치르고 잡은 고기여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도를 여행하면서 고기가 먹고싶을때는 회교도 구역에 가면 가장 값싸게 먹을수 있다. 힌두가 개종이 안되고, 태어나지는 것이 비해 이슬람은 개종을 할수 있는데, 이슬람을 믿기 위해서는 다섯가지의 계율을 지켜야 한다. 이슬람들은 이를 다섯기둥이라 표현하는데, 첫째 기둥은 샤하다(Shahada), 즉 증언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도이다'라고 언표하는 것이다. 두번째 기둥은 기도이다. 여기는 두개의 규칙이 있는데 하나는 규칙이나 의례에 얽메이지 않은 기도이고 또 하나는 살라트(Salat) 라고 하는 새벽,정오,오후,저녁,밤중에 하는 규칙적인 기도를 의미한다. 집단기도는 그들의 휴일인 금요일 정오, 모스크에서 이루어진다. 세번째 기둥은 하찌(Haji)라 하여 성지순례이다. 모든 무슬림은 메카에서 베디나로 이주한 예언자 마호메트의 행적을 따라 생애의 한번은 이 두개의 성스러운 도시에 발문해야 한다. 네번째의 기둥은 사움(Sawm), 금식이다. 무슬림 달력에서 아홉번째의 달에 행하는 라마단 금식인데, 노약자를 제외한 모든 성인 남녀가 참여하도록 되어있다. 라마단 한달동안 신자들은 해뜰때부터 해질때까지 음식과 음료수, 그리고 성관계(이것도 음식?)를 멀리해야 하며, 밤마다 특별한 기도를 드린다. 마지막 기둥인 다섯번째는 자카트(Zakat)라고 하는 기부이다. 원래는 소수자들을 위한 자발적 기부의 형태에서 후대로 오면은 국가의 권위를 인정했음을 뜻하는 공남이나 세금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More Information : http://jmiuubf.kimc.net/
인도 무슬림(M. Mujeeb 교수님의 The Indian Muslims에서)
인도 무슬림의 역사 - 무갈문화 탄생의 배경(초기 6황제를 중심으로)
무슬림의 유머-악바르와 비르발

 (3-3) 불 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도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불교일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인도는 불교의 발생지이고, 불교의 개조인 붓다는 인도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위시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 불교가 차지했던 위상을 본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막상 발생지인 인도에서 현재 불교신자는 600~700만 사이이다. 10억의 인구에 비해 1%의 비중도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인도에서도 불교가 번성했던 시기가 있었다. 우리가 잘아는 아쇼카 왕대의 마우리아 왕조는 불교가 국교였던 시기였고 우리 한국인들이 인도를 여행하면서 그나마 이질적이지 않게 접하는(힌두교에 비해) 대부분의 인도유적은 불적지들이다. 하지만 현재의 인도는 각 불교성지들도 외국인 신도들과 외국계의 절이 판을 치고 있을 뿐 자생적인 인도인 신도들은 손으로 꼽을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된 원인에 대하려 수많은 학자들이 많은 설을 제시하는데,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가 사라지면서 힌두교에 흡수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거 중 하나가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가 히눋교 3신중 하나인 비슈뉴의 화신으로 영입(?) 된 것을 꼽고 있다. 힌두교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불교의 초기 모습은 모든것이 힌두교와는 반대였었다. 카스트를 인정하는 힌두교에 비해 불교는 카스트 자체를 부정했고, 수많은 신들이 존재했던 힌두교에 비해, 불교는 시조인 붓다 역시 자신을 경배하거나 자신을 닮은 신상조차 만들지 말라는 엄명으로, 오히려 무신론에 가까운 모습을 띄었던 것이다. 종교 초기 시조의 열정적인 활동으로 교세를 넓힌 불교는 붓다 사후 수세기를 지나면서 처음의 생명력을 점점 잃게 되었다. 초기 카스트 제도에 대한 반발로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었으나, 불교역시 이후 기독교가 권력을 잡으면서 대중과 멀어지듯, 권력을 잡고, 왕들의 우산속에 들어가면서 초기의 신랄한 비판정신을 대부분 잃어 버리게 되었다. 대중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했던가? 불교도들은 포교라는 이유로 급기야의 불상이라는 것까지 만들게 된다. 이런식으로 불교의 종교화를 주장했던 세력들이 독자적인 종단을 만드는데, 이들이 후대 대승불교, 혹은 북방불교라고 부르는 종파들이다. 이후 북방불교의 출현으로 당시에는 다시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는데 성공했으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수많은 힌두교신들의 영입(?) 붓다의 신격화, 붓다를 중심으로한 수많은 신비한 전설, 전승의 창조들로 긍국적으로 인도인들이 보기에는 힌두교와 별 다르지 않은 그저 비슷비슷한 부류로 인식이 되었고, 이것은 인도내에서 불교가 생명력을 유지하는데 치명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인도로 들어온 이슬람 세력들로 인해 근거지였던 인도 북부지역이 초토화 되면서 자연스레 불교는 인도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현대 인도 불교의 중흥은 인도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암베드 카르에 의해서인데, 엄밀히 말한다면 종교운동이라기 보다는 하층민들의 정치적인 운동으로 보아야 할 현재 불교의 중흥으로 인해 그나마의 불교 신자수를 인도는 가지게 되었다.

 (3-4) 자이나교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종교가 자이나교인데, 그것은 외국인들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막스뮐러 이후 인도학 초기에 가장 첨예한 논쟁중에 하나가 붓다와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르가 동일인물이 아니냐는 논쟁이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비하르주) 에서 거의 비슷한 주장을 했던 이 두 선각자들이 서로 만났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으나 양쪽 초기 경전을 보면은 당대의 유력한 부호나 왕 들이 모두다 자기의 후원자라고 주장하고 있다.(이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것은 결코 중요하지않은 문제이다. 어차피 당대의 왕이나 부호들도 불교나 자이나교를 믿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거 커다란 승단조직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양쪽 어디든 접촉했다는 의미일테니까......) 시조인 마하비르는 지금 비하르주의 바이샬리(불교의 2차 결집지로 이 지역은 불교도들의 성지이기도 하다.)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수행생활 이라는 것이 극단적 고행과 무소유를 지향하는 것이어서, 옷도입지 않고, 구걸에 필요한 식기조차 휴대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이 극단적인 12년간의 고행끝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데, 이후 30여년간 세상에 더 머무르며 자신의 깨달음을 전파했다. 현재의 자이나교는 크게 두 파로 나뉘는데, 하나는 교조의 뜻을 이어받아 나체수행을 하는 집단이다. 여행자들이 자이나교의 나체수행자들을 접하기란 쉬운일이 아닌데, 때때로 엘로라의 동굴군에 나체수행자들이 나타나 한번씩 스치듯 볼수있는 기회를 제공하곤 한다. 현재 자인교가 가장 번성한 곳은 구자라트 주로 이곳의 빨리타나, 마운트아부, 우다이뿌르, 그리고 2001년 지진으로 완전히 부서진 부즈 지역의 자이나교 유산이 대표적이다.(이제 부즈지역의 그 아름다운 사원은 사진속에서나 볼수 있지 싶다.)

 

 (3-5) 시크교

14세기 중반에이르면 11세기 이후로 계속 되었든 이슬람의 인도 침입이 절정에 달하고있던 때였다. 양측이 서로 종교의 이름으로 죽고, 죽이기를 몇 세기를 이어내려 오면서 대립도 했지만, 나름대로 이슬람은 힌두교에서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힌두는 이슬람으로부터 종단 조직에 대한 것들을 주고 받으면서 발전한 경향도 없지 않아 있는데, 시크교의 창시자인 구루나낙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결국 가다 보면 이슬람이니 힌두니 하는 구분 조차 필요 없다고 역설한다.

이 새로운 비젼으로 그는 3차례의 순례여행을 떠나는데, 그의 뜻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종교조직을 이룬것이 시크교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슬람제국인 무굴제국이 성립되고, 무굴의 지배자들과는 때로는 협력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고 또 황제에 따라 대립 하기도 했었는데, 17세기 구루 하르고빈대에 이르러서는 무굴의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한 상시적인 무장군을 운영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의 뒤를 이은 두명의 구루들역시 무굴과의 대립과정에서 죽으면서 10대 구루에 이어서는 법통마저 끊기게 된다. 암리차르에 있는 시크교 사원인 황금사원은 이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곳으로 여행자들에게는 그저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인심좋은 사원일 뿐이다.

무굴이 망하고 영국이 들어오면서도 이네들의 신앙공동체는 계속 시련을 겪었는데, 세포이 항쟁당시 영국측 입장에 섰던 관계로 민족 반역자가 되기도 하고, 독립이후에는 시크교의 주 무대인 펀잡주가 파키스탄과 인도에 양분되는 사태에도 이르게 된다. 가장 최근인 인디라 간디 수상대에는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암릿차르 황금사원을 점거했고, 인디라 간디는 성스러운 사원에 탱크를 몰고 가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결국 몇달후 인디라 간디는 자신의 경호원이던 시크교도에 의해 암살되게 되고, 이 사건 직후 성난 힌두교도들에 의해 수많은 시크교도 들이 학살당하게 된다. (이들은 터반이라는 외형적 특징 때문에 숨길수가 없다. 이 학살극을 계기로 터반을 하지 않는 시크교도 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기마다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들은 인도인들에 비해 덩치나 외모가 큼직하기만 한데, 이런 이유로 군대나 경찰쪽에서는 상당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3-6) 배화교

조로아스터교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에게 무척 생소한 이름이지만, 또 다른 이명인 배화교라고 하면은 소시적 무협지께나 읽은 사람들은 기억이 날지도 모른다. 한때 엄청난 붐이어었던 영웅문3부만 봐도 명교라는것이 나오고 이것이 후일 명태조 주원장의 기반세력 이 되는데, 이 명교역시 배화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조로아스터교는 인도가 원산지(?)가 아니라 고대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의 국교였다. 현재 인도민족을 아리아인의 후예라고하는데, 이란의 페르시아족 역시 아리아인의 한 갈래이다. 인도인들이 아주 종교적인 민족이듯이, 이란 역시 한 종교 한다는데에는 둘째가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그것은 현재 탈레반과 함께 몇안되는 신정일치의 정치구조를 가진 나라라는 것역시 이를 반증한다. 같은 아리아 인들인 이들의 고대 경전, 즉 조로아스터교의 아베스타와 힌두교 최고 경전인 리그베다 사이의 유사성은 이들을 더욱더 가깝게 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는 짜라투르스타(가 영어식 표기고, 원래발음은 조로아스터) 인데, 그 역시 30까지 고행으로 일관하다 깨달음을 얻은후 77세가 될때까지 가르침을 폈다는 것이다. 이들의 경전인 아베스타와 베다의 유사성만큼이나 또 많은 차이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인 조로아스터교는 세계최초의 이원론종교이고 유일신교라는 것이다. 이원론이란것은 요즘의 기독교계열 혹은 이슬람계열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선과 악의 대립, 혹은 신과 악마의 대립등,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초한 것인데, 이런 이원론은 힌두교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다신교적 성격이 강한 힌두교에 비해 유일신교라는 것도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배화교라는 글자와 어울리게 이들은 불을 신성시여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후일 유대교의 유일신개념이나 불에 대한 신성성(이것은 구약시대를 통괄하며 신에 대한 제물을 바치는 희생제인 번제와 이에 대한 신의 응답의 상징으로써의 '불'의 등장으로 표현된다.)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받아들여지는데, 결국 유대교의 뿌리를둔 현대의 예수교나 이슬람교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산물이라 할수있다.
정말 무서운 아리아인들이다. 이런식으로 따지면 그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종교란 손에 꼽을만큼 드물어진다.
힌두교, 조로아스터교,불교,예수교,이슬람교,시크교,자이나교..........현재 인도의 조로아스터교인들은 본국에서 이슬람세력의 박해를 피해 구자라트의 마하라자에게 거주할곳을얻어 정착하게 되면서 인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현재는 뭄바이의 7만명가량을 포함해, 인도전체 10만명의 신도를 거느리는 세계 최대의 조로아스터집단이 되었다.
이들의 독특한 장례풍습역시 유명한데, 조장이라 불리는 이 장례법은 사람이 죽으면 철망이 있는 탑위에 시체를 걸어놓고 새들이 쪼아먹어서 남은 뼈들이 아래에 떨어지게 해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이교도와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는 관계로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3-7) 기독교

1498년포루투갈의 바스코다 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한 직후를 인도 기독교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나 AD52년 예수의 12대 제자중하나였던 도마(토마스)의 인도선교를 기원으로 삼기도한다. 종교가 무지 많은 나라 답게 인도의 기독교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개신교와 캐톨릭을 제외하고도, 시리아정교,그리스정교같은 우리가 쉽게 접하기 못하는 기독교일파들도 일정세력이 인도에 자리를 잡았다. 최근까지 포루투갈 하에 있던 고아주나, 께라라지역은 인도내에서도 기독교의 비중이 높은 지역중의 하나이다. 이 남부 직역은 전반적으로 캐톨릭의세력이 강한 편이고, 요즘들어 급격히 기독교로의 개종이 이루어지는 동북부의 미조람이니 나갈랜드니 하는 곳은 개신교의 세력이 강한편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사람들.....)

요즘들어 특히 인도남부를 여행다 보면 한국인 선교사들을 볼수가 있는데, 요즘들어 불고있는 한국 교회 인도선교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남부 께랄라주의 코친에는 유대교의 흔적도 볼수 있는데, 시나고규라 하는 유대교 특유의 사원이 존재하고 있다.

<Source 12> : 인도환타지

 4. 인도의 기독교 선교 Report

 (4-1) 인도의 개신교 현황

인도는 18세기 초엽부터 개신교 선교사의 진출이 눈에 뜨이게 나타났다. 덴마크왕 프레드릭 4세가 속해 있는 덴마크 할레 선교회 파견을 받아 인도에 온 독일 경건파에 소하는 찌이겐 발크와 플류차우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로부터 때로는 카톨릭교도로부터 방해와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참고 견디며 진실과 믿음으로 전도하는 일에 온몸을 받쳤다. 찌이겐 발크의 타발토어로 된 신약성경은 인도 최초의 번역이 되었고 인도 개신교 기반을 튼튼히 하는데 공을 세웠다. 찌이켄발크의 별세후 선교사업은 슐제에 의해 계승되었고 1724년에는 슐제는 구약성경의 타밀어 번역을 완성했으며 인도의 공용어인 힌두 스타니역 성경을 간행하는 데 공헌했다. 인도선교의 초기 개척자들로 덴마크 할레 선교회 속한 선교사들이었다. 덴마크 할레 선교회는 찌이겐 발크와 플류차유 외에도 56명의 선교사를 인도에 파송하였다. 그 중에도 1750-1798년까지 인도선교에 전념한 슈바르츠의 선교업적은 탁월하다. 덴마크 할레 선교회는 약 35,00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하니 초기 인도선교의 쾌거이다. 이런 초기의 선교가 18세기 말 슈바르츠의 죽음 후에 쇠퇴하여 소수의 그리스도인만 남게 되었다. 루터파 선교사들에게 세례받는 선교회의 자국민 목회자 양성의 소홀이 빠른 쇠퇴의 원인이었던 것을 간파할 수 있으며 슈바자르츠도 뚜렷한 인도인 목회자를 양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국인 월리엄 케리는 자신이 조직한 침례교회 선교협회의 선교사로 인도에 건너간 최초의 사람이다. 인도에 건너간 케리는 선교사 거주를 허용받지 못해 5년 동안 벵갈의 염료공장에서 일하다가1799년 덴마크 정착촌으로 옮겨 동역자 마쉬만 윌리암 워드와 함께 성경번역과 출판에 힘썼고 성경을 벵갈어와 범어와 마라드어로 전부 번역함과 동시에 그 외에도 중국를 포함한 37개어는 부분적으로 번역하거나 번역사업을 시도했다. 1806년에 입국한 헨리 마르틴도 1802년까지 우르느어로 전부 번역을 시도하였다. 1806년네 입국한 헨리 마르틴도 1812년까지 우르드어로 신약성경을 완역했고 페르시어어 성경의 완전개혁을 완수하였다. 1813년은 인도선교에 특기할 만한 연대이다. 그 이유는 선교사의 거주와 활동을 제한하여 오다 1813년 그 제한을 철폐하였기 때문이다. 렐키타 국교회의 감독교회 설치가 허락되고 이것을 계기로 19세기 전반의 개신교 선교는 급속도로 선장하였다. 스코틀랜드 국교회로부터 파송된 알렉산더다프는 1830년 인도로 건너가 교육사럽을 통한 선교에 온 몸을 바쳤다. 알렉산더 다프는 인도인 도덕심을 앙양하기 위해 유럽문화을 이해시킴이 첩경이라 생각하고 영어교육을 시행하여 북인도 지역의 사회계몽에 큰성과를 올렸고 인도 국민운동의 선구자라 불리우는 로이가 아왔음도 큰 성과였다.

 (4-2) 인도선교의 장애요인

일찌기 인도에복음이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인도교회는 지속적인 성장을 보지 못하고 상당히 둔화된 모습을 볼수 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중에 한가지는 인도에 1,660개의언어가 있어 선교에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현재 인도에서의 성서번역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1,491개 종류의 언어로는 일부분조차도 번역되지 않고 있다, 거기에다가 인도는 문맹률이 65∼75%여서, 문서선교에 상당한 제약을 받아오고 있다.

또한 복음전도에 제약을 주고 있는 것은 수천년 동안 인도인의 생활을 규제해온 카스트 제도이다. 다시말해서 힌두교는 출생에 따라 일정한 계급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속한 게급에서 떠나지 못한다.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사후에 온다는 환상인 것이다. 그렇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의 행동철학을 인지하고 최선을 다하여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후세에 더 나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만약 계급을 파괴하면 곧 추방된다. 그런데 인도 그리스도인의 80%가 낮은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천민층의 종교로 인정하여 개종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카스트 제도에서 온 인도 선교의 저해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인도는 힌두교, 불교, 제인교, 시크교 등 4개 종교의 발생지이며 모슬렘교, 기독교, 배화교, 유대교 등 외래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야기된 여러토착종교와 문제성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수많은 종교 사이에서 기독교의 위상문제이다. 이는 곧 인도인들로 하여금 기독교 복음이 보편족 종교중의 하나로 인식케하는 요인이된다.

둘째로, 자신들이 종교에 대한 우월성및 기독교와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점을 살펴보면 비그리스인들은 어디에 있어서도 자기들의 종교는 어떠한 종교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독교가 선교될 때에는 이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운영에 직면하게 된다.

셋째로, 사회적 악습 혹은 도덕적인 종교행위에 대한 기독교의 정면도전은 기독교가 구구내적으로 파괴적인 분열의 근원이 될수 있다고 의식하게 되었다.

넷째로 기독교의 선교활동 전반에 내포된 의도가 사람들을 타종교 가운에서 자란 신앙을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버리게 하려는 뜻으로 받아드려졌기 때문에 타종교는 거기에 대한 보복으로 기독교에 대해 항시 방어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 이러한 반응은 서구의 기독교 열강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지배했던 역사적 사실에도 그원인이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선교지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사역해야 하는데, 1984년부터 인도는 선교사 비자를 발급하지 않고있다.
그리고 19세기 전반에 개신교 선교를 가속화 시킨 것은 미국과 유럽 대륙에서 많은 선교사가 들어와 활동한 것이다. 인도에 들어온 미국의 첫번째 선교단체는 1819년 요한 수우더를 파송한 미국 외국선교위원회였다. 이들은 의료선교에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또 개혁교회는 1857년부터, 침례교회는 1836년부터,루터란교회는 1840년부터, 감리회감독교회는 1856년부터 인도선교에 가담했다.

유럽 대륙에서 바젤선교회(1834), 독일 복음주의 루터란 선교회(1841), 고르네스협회(1845) 등이 있으나, 독일 선교회는 1차 대전으로 영국 영토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후 유럽 대륙의 인도선교는 많이 후퇴 하였다. 한편 1858-1908년까지는 여선교사들이 많아 아동사업과여성을 상대로 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벌였고, 1877년도는 전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하류층에 대한 선교사가 본격화된 연대이다. 특히 미국침례교 선교회의 클라우에 의해 대중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1813년부터 1914년까지 인도 개신교 선교는 양적 증가의 차원에서 볼 때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역분포로 볼때 지나치게 남부에 집중되어 있고 다른 곳은 미미하다.

현재 인도교회는 9개의 주요 교단이 전교세의 83%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 로마 카톨릭이 850만명, 남인도 교회 160만명, 북동부 침례교회 110만명, 남아시아 감리교회 90만명, 루터교 연합교회 80만명, 북인도교회 60만명, 북동부 인도장로교회 30만명, 인도성결교회 27만명, 구세군 25만명 등이다. 이 외에도 소규모 독립교파들이 많이 있다.

 

 (4-3) 인도복음화 선교(사역) 전략

 (4-3-1) KWMA Report... - by 정 윤 진

선교사 인구 9억이 넘는 인도를 효과적으로 복음화하기 위하여서는 현재의 인도가 생성, 발전, 존재하게 된 지나간 3-4천년간 인도 역 사를 살펴보아야 되겠고(인도 역사 개괄, 수많은 영문/국문 서적들이 있음)또한 실제적으로 기독교의 복음이 인도에 어떻게 전래되었으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발전하게 되었는가(인도 기독교 교회사를 특별히 1600년대부터 현재까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함. Firth 인도 교회사 등 많은 영문서적들) 그 다음에는 현재의 인도를 직시하 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의 모든 영역에서 통합적인 관찰과 연구가 있어야 하며 특별히 힌두사상과 인도 국민성, 언어들, 종족 들의 특성과 다양성, 기후들(더운 날씨), 1억이 넘는 모슬렘들이 살고 있으므로 이슬람들의 정신과 생활태도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모슬렘 복음화 선교전략 연구는 중동과 모슬렘 국가들의 복음화 전략에서 참조하시기를 바란다.) 인도주류를 이루고 있는 힌두사상(인구 7억 이상이 힌두 교도들) 은 간단하게 말하면 다양한 신앙과 여러 가지 다른 종교들과 수많은 종교적 행위들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포괄적인 사상체계의 표현(그 중 에 어떤 한 부분이 표현된다하더라도)이며, 모든 종교와 종교적 행위는 다같이 중요하게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자연 종교이지 계시 종교는 아니다. 쉽게 말하면 소위 도를 닦는다, 수양을 한다, 고행을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출처-과정-도달점 등)를 알아보려고 사람 스스로가 최선을 다하여 사색하여 보고 생각하여 보고 체험하여 보고 느껴보고, 노력해 보고한 것들을 표현하여 놓은 사람 편에서 신을 찾아가 보는 체계, 인생의 갈구(구원, 영생)를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노력과 시도와 성취한 점들을 모아놓은 것들의 나열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물론 인생의 무지와 맹목과 운명론적인 불쌍하고 가련한 모습들의 포함되어 있다. 힌두 신앙 사상은 모든 종교들의 연맹 (League of Religions)이라 할 수 있다. 즉 모든 산들의 개울물과 시냇물들, 강물들이 바다에서 하나로 합쳐지듯이 모든 종교는 결과적으로 하나로 합일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다음 몇 가지 힌두사상 (Beliefs)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힌두구원론
힌두사상에서는 구원(Moksa)이란 가현(Maya=Illusion, 말하자면 항상 변하고 흔들리고 있는 이세상의 헛되고 헛된 모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자유하는 일)인데, 다시 말하자면 고통과 폭력과 속박, 그리고 출생과 죽음의 윤회(힌두교, 불교 사상의 윤회설 참조) 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힌두 아베이타경에 의하면 구원은 개인의 모든 제한과 속박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하여 궁극적 실재(참 神)와 합일(合一)하며 동일(同一)시 되어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힌두사상에서는 기독교의 구원관은 너무 쉽고 값이 싸다고 말한다 (은혜의 높은 차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한 행위 카르마(Karma)에 의하여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원관은 수많은 고행(선행, 노력, Sadhand=Discipline=계속적인 훈련, 수련)에 의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이번 70평생에 이루지 못했다면 다음에 태어나서 또 70평생(윤회사상)때에 잘하면 마침내는 궁극적인 실재와 합일한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실재로 그들과 같이 살면서 대화를 나누고 삶의 실상을 살펴보면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느낌(깨달음)을 그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노력(선 행=고행)에는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사람의 선행은 심히 제한되어 있거나 불가능하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고 깨닫고 실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영원한 진리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엡 2:8-9)로만 구원(인생들의 갈구의 해결=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복음, 기독교의 진수를 증거하고 가르치고 확신하도록 하여 예수의 제자 삼는 길로 인도하여야만 하겠다.

죄론
힌두 신앙에서는 죄(아비야)라는 것도 무지, 물질에 속박 당한 것, 도덕적 실패라고 말한다. 기독신자들은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반역)하고 물질에 유혹되었고 참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여 악과, 사탄, 육체의 정욕에 미혹되고, 쫓아가고, 빠져버려서 전혀 희망이 없고 영영한 멸망에 이른 것이어서 희생불가능한 상태이지마는 힌두들은 인간의 노력(선행, 고행 등)으로 가능하다는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人, 사람에 대하여
힌두사상에서는 사람의 본질(진정한 실재)은 영이지 결코 물질이나 몸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기독교 복음 증거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일면이다.

神, 하나님에 관하여
힌두인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수많은 신들 배후에는 오직 한 분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많은 신 들은 오직 똑같은 그 한 분의 현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힌두인들은 궁극적인 실재(神)는 영이며, 우주 만물의 존재의 근거가 영이다. 결코 물질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힌두인들은 신의 본질은 진리(Sat) 생명(Cit)이요 완전한 신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한다.(神人同質論) 힌두인들은 궁극적인 신(존재, 실재)은 변함이 없다고 믿는 다.

힌두인들은 현재의 힌두 신앙표현이 우상의 종교로 전락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힌두경(Veda)에는 우상을 말하지 아니하는데, 후세 사람들의 종교적 행위의 욕구가 무엇인가 손에 잡아보려는 현실성 때문에 우상을 만들었다고 변명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세상에 관하여
힌두 아베이타경에 의하면 이 세상은 오직 가현(Illusion)에 불과하고 참 신만이 실재요 영원하며 만물의 근거라고 말한다. 이러한 점들은 선교사역자들로 하여금 힌두복음화의 접촉점(Contact Point)과 대화의 전개(Stepping Stone)에 명확한 도움과 자신감을 가지게 할 것이다. 이제는 선교사역이 15년 동안의 실제적으로 부각됐던 일들(경험)을 중심으로 선교전략을 논하여 보면 좋을 것 같고 구체적이 될 것 같다. 현재는 인도신학대학 (Asia Evangelical College Seminary) 학장으로 사역을 하는데 지난 4월 13일에 제5회 졸업식으로 목사가 되는 과정(M.Div, M.Min)에서 14명 졸업, 학사과정 4 명이 졸업을 하였고 9명이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또한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선교사역의 가장 중요한(신학교 운영과 더불어) 부분이라고 본인은 확신하고 있는 바인 선교지에서의 기독교 학교 운영(유, 초등하교-대학교까지)이다. 각지역 사정에 따라 특수성들이 있는 점들을 감안한 교육 수행의 기술이 필요하지만 한결같이 착실한 기독교 교육을 시행한다는 것이 주된 흐름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교육(학교운영) 은 크게 2가지인데 한 가지는 모두모두를 전도하는 일, 그들을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들(장기적으로)로 양육하는 일이다. 그 다음으로 삼각다리(교육-교회-신학교)의 두 번째되는 신학교 교육으로 신학생 배출을 통하여, 철처히 자립(自立)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계속적인 개척교회 설립이다. 인도 전지역에는 물론 나아가서는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미얀마에까지, 복음으로서 구원을 받은 현지의 성도들의 믿음과 기도와 충성으로 개척, 설립, 성장하는 선교지 교회를 계속 설립하여 나아가는 사역이다 (India Evangelical Churches). 가장 핵심적인 중요한 삼각형(Triangle, 신학교, 교회개척, 기독교학교 교육) 선교사역에 더하여 노방전도, 가가호호 방문전도, 문서전도, 대중집회 전도, 부흥사경회, 실력있고 헌신된 교사 양성(국민학교, 기독교학교), 여성도들(여전도회)을 통한 전도, 18-60세까지의 청장년들의 3개월에서 1년 가량의 전도훈련을 시켜서 실제적인 전도자로 내어보내는 일, 목회자재훈련 등도 실시하고 있다. 물론 의료선교, 운동선교, 구제봉사(고아원, 급식등) 선교, 기술을 가르쳐 자급자족케 하는 복음전도사역등이 오랫동안 생각되어 져왔는데 점진적으로 실천할 것이다.

현대 선교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를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을 강조하여 말하고 싶다.

첫 번째로, 현지인 전도자, 목회자 양육을 우선으로하는 선교지 중심의 선교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2년 전에는 선교는 인생 최대의 종합예술이다 라는 격언을 짓게 되었고 수년 전에는 선교는 선교지에서 선교가 잘 되어지는 선교사역이 되어야만 하겠다는 격언을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선교가 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들이 서구 선교 사역에 의해서 오랫동안 실천되어 왔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고아원 운영, 구제의 일, 교육선교, 병원선교, 교회당과 넓은 땅을 구입하여 크리스챤이 되면 그 땅 안에서 같이 살게 하였던 일 등.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많은 나라들에서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한 점도 많았고 어떤 일들에서는 10-20% 정도만 실효를 거둔일도 많다.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현지인들을 잘 양육시키고 훈련시켜서 그들이 전도도 하고 교회개척도 하고 목회도 하 고 또 신학교 교수도 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되는 과정(M. Div.)은 반드시 그 나라 안에서 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고, 만약에 전혀 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바로 이웃나라(예. 네팔인은 인도에서, 필자의 신학교에서도 인도, 네팔, 미얀마 3국인들이 공부하였고 금년에는 부탄과 다른지역에서도 옴)에서 목회자 과정을 마치도록 하고 교회개척을 하던지, 이미 시작된 교회에서 적어도 7년 가량은 잘 목회를 하여 어느 정도 성장을 하였고 또 가르치는 은사나 재능이 있어서 교수 요원으로 적합한 점이 보이면 1-3년 특별훈련을 시켜서 선교지 신학교 교수 요원으로 일할 수 있겠다. 네팔의 선교사 한 분은 현지인 8명을 의욕적으로 한국에 신학교육 유학을 보냈으나 한 사람도 보낸곳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뿔뿔이 헤어졌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선교사의 자질과 경험과 헌신의 자세가 분명하여야 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교사 후보자가 본국에서 목회자(M. Div.) 과정을 마치고 개척교회 목회나 단독목회를 5-7년 가량 잘한 분이 선교사로 파송되기를 바란다

<Source 13> : KCM (한국컴퓨터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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