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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전라여행

[진도여행]눈빨이 날리는 날...배중손 사당에서의...서릿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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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중손사당

裵仲孫祠堂

 

고려원종 11년(1270년)몽골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환도를 강행하자 삼별초군은 이에 불복하여 대몽항쟁의 결의를 다짐하며, 1,000여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진도로 남하하여 용장산성(사적제126호), 남동석성(사적제127호)등에서 여몽연합군과 항쟁을 하였다. 이곳은 대몽항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 장군의 위패를 봉인한 사당이다.

 

봄날의 눈발....뿌나가 배중손사당에 서있을때..묘한 날씨가 펼쳐진다.

혹여 배중손장군의 아픔을..풀어달라는 것인가!?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에 위치한......고려원종 11년(1270년)에 몽고와 굴욕적인 강화...개경환도. 

 

홀로....있었야...하는..가..ㅜㅡ...!?

눈빨이..휘날리는 것이...독야청정인가!?

배중손...장군.....의..간절함이..오늘..뿌나에게...가르쳐 주시는 건가!!??

 

 

배중손(裵仲孫)에 대하여
미상∼1271년(원종 12). 고려 원종 때의 장군.

서반의 장군인 동시에 가장 유력한 삼별초의 지휘관이었던 까닭에 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수령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배중손이 역사에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삼별초의 대몽항전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의 경력은 자세하지 않다. 단지 임연(林衍) 부자 계열에 속하는 무인으로 대몽 강경파의 선두에 서서 비타협적 항전의 계속을 주장한 인물로 추정될 뿐이다.

몽고를 방문하고 개경에 돌아온
원종이 출륙환도(出陸還都)를 단행하고 삼별초에 대해서는 강화도를 철수하여 개경에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삼별초가 이를 거부하자 왕은 강제로 해산명령을 내렸는데, 이에 대하여 삼별초는 원종을 폐하고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여 강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배중손 등은 본토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을 포함한 섬 주민들과 병사의 이탈을 엄중히 방지하였다.

또 도내에 있는 몽고인을 베어 단호한 대몽항전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강화도에 보관된 국고를 접수하고 귀족 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다.
배중손 등의 지도로 이들은 새 정부 수립 3일 후에 진도로 본거지를 옮겼다.

《고려사》의 기록은 수비병의 탈주와 민심의 동요로 인하여 삼별초가 강화도를 포기한 것처럼 전하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른바 심입해도(深入海島)는 역대 대몽항쟁책에 있어 최고 최후의 전략이며
배중손은 이를 단호하게 실천하였을 뿐이다.

진도에 본거를 설치한 삼별초는 도내에 방비의 성곽을 구축하고 웅장한 궁전을 설치하여 장기 항전의 태세를 굳혔다. 이 소식은 본토에도 전달되어 전라도경상도의 주민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들이 이에 호응하여 동조하였다.

또 삼별초는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노획하여 재정에 충당하였다. 개경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에 임명하여 토벌하게 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또한 고려는 단독으로는 진도의 삼별초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몽고와 연합하여 공략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고려군의 지휘관은
김방경(金方慶)이며 몽고군의 지휘관은 처음에는 아해(阿海)였으나 뒤에는 흔도(欣都)로 바뀌었다. 흔도몽고세조(世祖)의 조서를 배중손에게 전달하여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배중손
은 몽고군이 철수하면 전라도를 자기의 영토로 삼아 몽고에 내부(內附)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배중손의 이 제안은 앞서 자비령 이북 서북면 60여성을 들어 몽고에 항복한 최탄(崔坦)
의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사실은 작전상의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전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려몽고의 연합군이 진도 공략에 여러 번 실패하자 이듬해(1271) 5월
홍다구(洪茶丘)몽고의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김방경흔도의 휘하에 있던 연합군과 합세하여 격전 끝에 간신히 진도를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삼별초의 새 정부 군왕인 승화후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
도 이때 전사한 듯 그뒤의 소식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삼별초의 여당은 진도 함락 이후에도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김통정(金通精)을 지휘관으로 삼아 2년간이나 더 항전을 계속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元史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金庠基, 震檀學報 9‧10‧13號, 1938‧1939‧1941)
高麗の三別抄について(池內宏, 史學雜誌 38―9, 1926)

 

 

  

하늘은 청명하고...눈빨이..날리고...소나무와..사당의..모습은...아이러니를 꿈꾸게한다..

 

 

정충사~

 

 

배중손장군의 동상과...그 반대편의 눈빨들....이것이......서릿발아닌가...일침....한서린...우리의...오늘날을...일침하는....자주국방... 

 

봄날의 눈빨은..뿌나의...정신을 ...일탈..하려는..것인가!!??

 

 

 

무슨 사연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모습이 무엇일까!?

자주국방.....목숨을 받혔던 배중손 장군..고려역사..길이 빛날 인물... 

 

 

 눈빨이 보이시죠...왜 뿌나의 눈에는...서릿발로 보일까요!!?? ㅎㅎ

 

 

이 비(碑)의 전문을 보면 - 고산 윤선도 선생(孤山 尹善道先生)은 조선 시대 중엽 시조문학의 대가로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강직한 선비였을 뿐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남다른 행적을 남기셨다고 한다. 선생은 이곳 굴포에 백정보 가량의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어 이곳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셨다. 나라의 힘이 미치기 어려웠을 때 의진 이곳에 이일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그 땅을 부려온 것은 길이 전할 만한 일이다. 여기 사람들은 선생에게 대한 감사한 마음과 이바다의 둑이 탈이 없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매년 음력 정월 보름이면 제전을 올리고 굿을 해왔다. 이사연을 영원히 남기고자 정성을 모아 여기 비를 세운다.

백계씀  측면에 - 서기 1991년 4월 6일 건립

 

 

[굴포신당유적비(屈浦神堂遺蹟碑)...]

 

고산 윤선도선생 사적비 후면.

고산과 해남윤씨가의 간척 - 우리나라 간척의 기원은 고려 고종 35년(1235년) 몽고침입으로 인해 방어 목적으로 연안제방을 구축한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1256년 고종 43년 원나라의 침략에 강화로 피신하였을 때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방을 쌓았고 그 이후에도 가뭄과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에서도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해남윤씨가는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집안으로 고산은 1640년(54세)에서 1660년(74세) 사이에 완도, 진도 등지에서 간척사업을 펼친 것으로 보고 있다.

 

 

 

 

누구의 간절함(?)...배중손장군님께...바랄 것이 있었을까요!? 군에 간 아들...나라를 지키다 산화한...순국선열의 후손일까요??

그의 간절함이...이루어지기를..바래봅니다..

 

 

 

 

 

눈빨이 나는 구나...^^;;;ㅎㅎㅎㅎ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전(對蒙抗戰)을 이끌었다. 삼별초의 대몽항전 이전 경력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최씨 무인집권 이후 실력자로 등장한 임연(林衍) 부자 계열의 무신으로 대몽항전을 계속할 것을 강경히 주장했던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과의 강화가 성립된 뒤 개경환도(開京還都) 문제를 둘러싸고 원종을 중심으로 출륙(出陸)을 희망했던 문신 일파와, 이를 반대하고 강도(江都:강화도)를 근거지로 삼아 계속적인 대몽항전을 도모하려 했던 임연을 중심으로 한 무신 일파가 대립했다. 1270년 몽골을 방문하고 돌아온 원종이 환도를 포고하고 강도 안의 모든 기구를 개경으로 옮길 것을 명하자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 군인들은 환도에 불복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원종이 장군 김지저(金之氐)를 강도에 보내 삼별초를 폐지하고 병적(兵籍)을 몰수하자, 삼별초의 영수인 그는 야별초(夜別抄)의 지휘관 노영희(盧永禧)와 함께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추대해 임금으로 앉히는 한편 관부(官府)를 설치, 관리를 임명하고 개경 정부와 대립하면서 몽골에 대한 항전을 시작했다. 육지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강화도에 있던 몽골인을 베어 항전의 결의를 다진 그는 도내(島內)의 문무관 중에 동요가 일어나자 심입해도(深入海島)의 전통적인 대몽항쟁 전략에 따라 1,000여 척의 함선을 징발해 공사재물(公私財物)과 백성을 싣고 강화도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면서 남으로 내려가 진도에 근거를 정하고 섬 안에 성곽을 쌓고 궁전을 지어 장기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뒤 삼별초군은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빼앗아 재정문제를 해결하면서, 전라도·경상도 주민들과 개경 관노(官奴) 등의 호응에 힘입어 남해연안과 나주·전주에까지 출병, 관군을 격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가 이끄는 삼별초군을 정벌하기 위해 개경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에 임명해 군대를 보냈으나 패배를 거듭했다. 이에 개경정부는 몽골과 연합군을 구성, 삼별초 공격에 나섰다. 그는 몽골의 아해(阿海)와 고려의 상장군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그러나 1271년 대군을 이끌고 연합군에 합세한 몽골의 홍다구(洪茶丘)의 총공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패배했다. 이로써 삼별초의 진도 근거지는 마침내 함락되었으며, 그 역시 이때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진도 함락 뒤에도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한 나머지 삼별초 군인들은 제주도로 들어가 최후의 항쟁을 계속했으나 결국 이들도 1273년에 이르러 평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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