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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전라여행

[전주여행]전통 한옥마을이 평풍처럼 펼쳐지는 오목대에서 이목대도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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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이목대는 태조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으로, 고종이 직접 쓴 비문을 통해, 조선 왕조의 시조인 이안사가 이곳에 살았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목대는 후에 조선을 세운 이성계 장군이 당시 군사를 이끌고 잠시 쉬어가던 장소이다. 고종이 직접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 (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는 비문을 새겨 놓은 비는 광무 4년(1900)에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유적지는 조선 왕조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가치 있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는 전주 전통한옥마을의 모습이다...^^;;;;

 

이목대(梨木臺) 오목대(梧木臺)

이목대와 오목대가 있는 교동의 옛 이름은 자만동이었다.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대왕 이안사(李安社)가 태어나 살았던 곳으로 이를 기념한 고종의 친필 이(목조대와구거유지)가 서 있다.

오목대는 목조대왕이 자연의 풍광을 즐기며 노닐던 곳으로 목조가 자라면서 이 곳 자만동에서 호랑이와 싸웠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또한 오목대는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돌아가는 길에 이 곳에 들러 종친들과 진승축하잔치를 벌인 곳으로 유명하다.

이를 기념한 고종의 친필비가 서 있다.

 

 

전주시 완산구 교동(교동) 풍남동(풍남동) 일대 7만여팽에 약 700여 채의 전통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성곽을 헐고 도로를 뚫은 뒤 일본 상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현재까지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승전을 기념해서 한고조(漢高祖)가 불렀다는 태풍가를 불렀다고 전해지는 이곳이다..

누각에 "대풍가"가 걸려있습니당..ㅎㅎㅎㅎ

 

풍운 속을 일어섰다 위세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오니 모두 수그려 우러러맞네.

 

충분히 역성혁명을 통한 천하제패의......의미가 있겠다...-쭈니생각-

 

- 유방이 황우를 물리치고(천하통일) 고향에서 종친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는 자리에서 읊은 시로 한나라를 세우는 시발점이 되는 것-

 

 

 

이길로 내려가면...전통 전주한옥마을로 가는 길이 된다..^^;;;

하지만..쭈니는..일딴...이목대도 가야한다..ㅎㅎㅎㅎ

 

 

 

 

오목대는 고려 우왕 6년(1380)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역사로 보자면....황산대첩되겠다..^^;;;; )

이성계가 개선 길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 제국 광무(光武) 4년(1900)에 비석을 건립했는데,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필遺地)>라는 비문은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 것이다.

 

 

 

 

 

승암산에서 오목대까지 산이 이어져 있었으나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맥이 끊겼다. 그래서..설도 많다(요밑자료참조 ^^)

그래서 오목교를 설치하여 끊어진 맥을 이었다한다. 오목대에서 육교 (오목교) 건너편으로 약 30m 쯤 아래 윗쪽에 그러닌깐 승암산 발치부분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4대 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전주이씨들은 이안사 때까지 줄곧 이 곳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이사했다고 한다. 고종 광무 4년(1900)에 , 이곳이 목조가 살았던 터임을 밝힌 <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地)>라는 고종의 친필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비각은 당초 오목대의 동쪽 높은 대지 위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공사로 이 곳으로 옮겨 세웠다.

 

 

이목대를 지나오면서...아침 햇살이..머리를 비춘다......^^;;;;

쭈니가 가장 좋아하는...싯점중에 하나다.....꼭!!!!

신의 선택처럼...ㅎㅎㅎㅎㅎ

눈부신 아름다움이다..ㅎㅎㅎㅎ

 

 

이목대를 보고 다시 오목대로 간다...그럼 ..이렇게 이쁜 산책길이..전통 한옥마을로 갈수 있다...ㅎㅎㅎㅎㅎㅎ

 

 

햇살 가득한 아침...혼자서 걷는..운치는...어떻게 표현 할 방법이 없다...

흙냄새와.....아침 공기...이곳이 바로 전주 한옥마을의 아침인 것이다....^^;;;

짱좋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 1-3번지

 

참고편 -샘가 두루미님 글에서-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벌에서 왜구를 물리친 뒤 돌아가는 길에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었다고 한다.

大風起兮雲飛楊       대풍기혜운비양
威加海內兮歸故鄕   
위가하내혜귀고향
安得猛士兮守四方    안득맹사혜수사방

 

큰 바람이 일어나서 구름이 날아 오르다
위세가 해내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디서 용맹한 무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대풍가를 통해 이성계는 흉중에 묻어두었던 천하제패의 꿈을 은연중 드러냈다. 이에 종사관으로 참전했던 정몽주가 격분한 마음에 한달음에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북쪽 개경을 바라보며 그 심정을 노래로 읊었으니 지금도 만경대에 그 시가 새겨져 있다.

千?岡頭石逕橫 登臨使我不勝情    천인강두석경횡 등임사아불승정
靑山隱約夫餘國 黃葉?紛百濟城   
청산은약부여국 황엽빈분백제성
九月高風愁客子 百年豪氣誤書生   
구월고풍수객자 백년호기오서생
天涯日沒浮雲合 矯首無由望玉京    천애일몰부운합 교수무유망옥경

 

천길 된 바윗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어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누른 잎이 휘휘 날려 백제성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열없이 고개 돌려 옥경만 바라보네

이 우국시가 만경대에 각자(刻字)한 시기는 전라도 관찰사 권적(1675-1755)이 임술년인 1742년에 새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전라도 관찰사를 두 번했던 李書九가 포은시를 차운(次韻)한 시(1820년)가 적혀 있다. 정몽주가 憂國詩를 남긴 지 12년 만에 선죽교에 선혈을 뿌리고 순사(殉死)했으니, 이미 오목대를 뛰쳐나갈 때부터 이성계와 정몽주의 운명이 엇갈렸던 모양이다.

오목대에서 원대한 포부를 밝힌 데에는 어쩌면 전주가 이성계의 모태의 땅이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조선 왕조의 모태가 된 전주 땅이지만 48명의 임금 가운데 전주를 방문한 조선 임금은 태조 이성계가 유일하다고 하니 이 또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오목대는 조선왕조를 세운 전주이씨와 별도로 생각할 수 없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때 전동성당의 건립 예정지로 거론되었다가 포기한 것이나, 일제강점기 일본왕(천황)의 권위를 보이고자 했던 신사가 오목대를 피해 다가산으로 옮겨 간 것도 오목대에 대한 전주 사람들의 ‘정신적’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전주에서 일어난 조선 왕조가 몰락해갈 무렵 고종황제가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와 비각을 세운 것은 초심으로 돌아가 왕조의 부흥을 꾀해보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종황제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몰락해버린 이유를 ‘주필(駐?)’에서 찾으면 안 될까? ‘주필’이란 임금이 머무른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직접 전주에 오지도 않았으면서 ‘주필’이라 하였으니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세우기 어려웠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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