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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일 본 Japan

대마도여행/조선통신사 객관터 고쿠분지(국분사)산문 - 1800년대 우리의 조선통신사들은 이곳을 왔구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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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우리의 조선통신사 들은 이곳을 왔구나....오!

대마도여행/조선통신사 객관터 고쿠분지(절)산문

 

 

 

 

뿌난..여행후...사진을 보고 포스팅을 하면서..

새롭게...공부도합니다.

 

3월 1일의 의미도 있고...

"과거를 알고..현재를 느끼며..미래는 꿈꾸는 자"

 

세월이 아주 많이 지나고 나면...

블로그포스팅이 조금은..미소짓게 하리라..믿기에...^^*

 

부산에서 대마도까지의 거리는..약 50km 제주보다 가까운 것 아시는 분 손? ㅋ

 

 

대마도여행...하루치기(?)

사전 정보 없이..돌아댕기(?)는 것 좋아라하는 뿌나..

이날도 하염없이...댕겼다능...

 

일본인에게 길을 물어서...ㅋ

좋은 곳이 어디냐고 하니...이곳을 가르쳐 준다....캬~캬~캬~!!!

고마운 분들....이글을 빌려 감사를 전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데...사진을 메일로 보내줘야는데...ㅜㅜ)

 

자~ 그럼...대마도여행 조선통신사 객관터 고쿠분지(국분사절)을 한번 돌아보자....능...

이즈하라항에서 걸어서..가도 되는 거리의...고쿠분지입니다.

 

 

여행팁!!!

이즈하라항의 관광안내소에는 한글판 지도가 있습니다.

꼭!! 보시면서..알찬 여행하시기를...

 

 

 

746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로 고쿠분지라고 절입니다.

나라시대에 전국적으로 창건된 고쿠분지가운데 하나...

대마도에서 네기둥으로 만든 문이 이것이 유일하다네요....

(공부중 알게됨..ㅋㅋ)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약 200년간(1607~1811) 12차례의 교류가 있었다합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으로 들어가는 첫 도착지가 대마도였으며, 사스나를 지나서 이즈하라에 도착하여 머문 곳이 고쿠분지라고 합니다. 1811년 조선통신사와 막부가 접견하였고 머물렀던 곳입니다. 절 뒤쪽에는 공동묘지가 있고 가장 높은 곳 며비 전면에 '종삼위훈일등국분상태랑지묘)라는 글이 있다합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목숨을 잃은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 고쿠분 쇼타로(1859~1921)가 죽자 그를 애도해 매국노 이완용이 써 준 비문이라고 하는데..안보길 ㅋㅋ 잘한 듯합니다. 대마도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어학소가 있다합니다. 고쿠분 쇼타로는 이곳에서 한국어를 배운 뒤 1904년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이 되었고 조선총독부 인사국장과 궁내부 차관까지 올랐다합니다.

 

 

 

조선통신사의 이동경로는 한양 -> 부산 -> 대마도 -> 시모노세키 -> 오사카 -> 교토 -> 에도(지금의 도쿄)에 도착.

거의 6개월에서 1년의 여정 그뚜...300~500명이 함께 했다니....상상이 가시는 지...호~~!!!!!

 

뿌나는 대마도 오사카 교토는 가봤으니..이제...동경(?) 음...생각함해보공....ㅎㅎ

 

고쿠분지 종루 옆의 단풍이..참 애닯게 느껴져...담아보았습니다...

 

 

고쿠분지의 정문을 지나면...이렇게..고쿠분지의 종루옆으로 길이 있습니다.

조용하니...2016년의 12월 중순경이니...아마도...

뿌나 혼자서..경내를 거니면...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옛날의 조상님들의 숨결...

좋은 시절에 태어났기에..이렇게..아무것도 아니..뿌나가...올수 있었다는 것...

많은 생각이...이곳에서..있었네요...

 

 

 

일본 대마도 고쿠분지 종루~

분위기는 사뭇 ^^ 울 나라와는 다르다능...

매화가 피면...고쿠분지 종루의 아름다움이..한층..더~ 업업!! 될 듯 하담서...ㅎ

 

 

정원한켠의....꽃들...

 

정확한 명칭을..몰라서..사진으로...아는 한도내에서는....

표현했습니다....

자료가 영 없다능..ㅜㅡ....

 

 

 

 

 

특이한 도깨비상(?) 암튼..

처마밑에...있네요...

토테미즘이 곳곳에 있다능...^^

 

이곳이 공동묘지...서론부에...고쿠분지의 설명에 상세하니 표현했죠..ㅋㅋ

그래서 패수~ ㅎㅎ

 

 

 

 

앞에서 소개했죠..공동묘지...

 

 

고쿠분지 종루와 정원..마당...^^;;;

 

 

 

 

 

 

공동묘지 방향에서 본...대마도 고쿠분지 종류와 앞 마당...

 

 

12월 중순...따뜻한 봄날인 듯...

괜히..옷을 뚜겁게...입었다능...ㅜㅡ..아~ 더운 기억....

 

 

 

 

비밀공개...이곳에서...노오란 낙엽을 4장가져와서...선물하는...뿌나의 센수~...ㅎㅎ

뿌나의 의미는..이런 것...벗님들~ 사랑합니다.

 

따뜻한 나라의 12월 은행나무잎....

 

 

12월인데..이곳 대마도 고쿠분지의 주변은..노오란 낙엽으로...운치를 더해줍니다.

혼자보기는 참 아까웠다능..ㅎㅎ

 

 

아낙네일까요!?...

정원에 있는 조금마한 것들을...

 

정원에 놓여있는 토상(?) 토우(?) 암튼...

 

 

고쿠분지 종루의 또다른....예전에 이곳을 공사할 때..많은 분들이 다녀오신 듯....

 

 

 

고쿠분지 지장전과 지장보살상.

 

 

고쿠분지로 들어갈때는 몰랐는데..나오는 길에..역사의 아름다운 흔적이랄까...

이렇게 단풍이 있네요...잠깐 머물며..몇장을 담았답니다.

 

비슷하고도..너무나 다른..곳...

아주 오래전에는 이곳도...우리의 영력이란..생각을 지울길이 없었네요...^^

뿌나의 상상은...언제나...히~~~

 

 

이곳이..나가는 곳...^^;; 어떻게...잘 보셨는지요!? ㅎㅎ

 

 

대마도 공부를 하다...알개된..봉화일보 기자님의 글을 옮겨본다...^^*

 

대한해협에 떠있는 조그만 섬 대마도!. 이 곳에서 맑은 날은 육안으로도 부산의 야경이 보일 정도로 한국과는 지척에 있지만(직선거리 49.5
km) 오히려 일본의 후쿠오카에서는 138km나 떨어져 있어 변경의 섬 또는 국경의 섬으로 불린다. 이 섬은 울릉도의 약 10배, 제주도의 약 40%정도로 그 면적은 약 700㎢이고 섬의 89%가 해발 400m 안팎의 산림지대로 이루고 있으며 인구는 36만명이다.
후쿠오카현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지만 다도해 지역으로 나가사끼현에 속한다. 미스시마, 도요타마, 미네, 가미아가타, 가미츠시마마치 등 6개 마치(町)중에서 이즈하라는 행정, 무역, 문화의 중심지로 최근 시로 승격되었고 쓰시마 시청(大馬市役所)이 있었다.
이 대마도는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 본토사이의 중계기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며 오랜 세월동안 대륙문화를 일본에 전하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해왔다. 일본 사람들은 왜 이 섬을 ‘대마도(對馬島)’라 쓰고 ‘쓰시마’라 하였을까? 대마도라는 이름은 삼국지 위지동인지(韓條 倭條)에 처음 나오는 ‘대마국(大馬國)’에서 국(國)을 뺀 것이다. 대마도는 삼국시대 초의 본래 이름은 ‘쓰시마’와 음이 같은 ‘진도(津島)’였다. 진(津)은 ‘쓰’로 발음되고 배가 닿는 곳이라는 뜻이며, 도(島)는 ‘시마’로 발음되며 섬이란 의미이다. 그들은 이같이 섬의 이름조차도 왜곡을 하고 있다.
대마도는 생김새가 말머리와 유사한 두 섬이 마주보고 있다하여 대마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문헌에는 삼한시절 우리나라 경상도 지방에 있었던 마한(馬韓)과 마주보고 있어 대마도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고려 말부터 한국에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품을 받아 갔으며, 조선 때에는 대마도주가 조선 국왕의 임명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평화시에는 한국과 일본간 교역을 독점하였으되 전쟁시에는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389년 (고려 창왕 2년)에는 박위가 대마도를 토벌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그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통상의 편의도 봐주고 또 귀화 정책을 쓰는 등 우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곳을 근거지로 한 왜구의 행패가 여전하자 세종 때인 1419년 음력 6월 조선의 세종임금이 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군사 1만 7,285명을 동원하여 대마도를 정벌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왜인의 통상을 위하여 3포를 개항하고 그들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조선의 국왕이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려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아래 두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조선에 근접한 왜구의 근거지로서 이것을 무마하려는 한국의 해방정책(海防政策)에 따라 특수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 후에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의 근거지가 되면서 차츰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대마도가 급작스럽게 일본의 영토가 되면서 일본의 관리가 대마도를 통치하게 된다.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대마도주 가문은 일본의 귀족으로 들어갔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는 일본의 강요로 대마도주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그 후에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848년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 이니 일본은 조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19488년 9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 했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같은 주장을 하여 왔다.
이같이 대마도와 우리는 예로부터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 아닐 수 없고, 아주 먼 옛날 현재의 경상남도에 붙어 있던 땅과 부속 도서들이 지진 화산 활동 등에 의해 떨어져 나간 섬들이라는 추측이 가능 하다는 얘기이다.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지만, 오히려 대마도는 어쩌면 한반도의 섬이었으리라. 대마도에 남아있는 역사유적이나, 생활풍습, 성씨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우리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흔적이 발견되는 섬이다. 또 우리의 삼국시대부터 우리와 교류가 가장 많았던 곳이다. 우리민족의 피가 유유히 흐르는 섬이다.
대마도는 고려 말부터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왜족이 살았지만, 고려의 지배를 받았던 섬이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몽고군이 상륙해서 점령했던 유적 안내판도 보인다.
당시 대마도 도주(島主)와 소(宗)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 염포, 제포)를 개항하자 이 섬은 에도(江戶)시대 말까지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했던 곳이라 했다. 이 섬에는 소(宗)씨의 일족이 대대로 살아 왔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아비루(阿比留)라고 말하는 성씨가 지금도 살고 있는데 아비루는 백제 비루계의 ‘아직기’의 후손들이라 한다.
대마도는 위도상 남위 34도로 제주도의 기온과 비슷해서 봉화지방은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가는 곳마다 동백꽃과 복숭아 꽃 등 봄철에 피는 꽃들이 만발하여 우리들이 도보로 답사를 하기엔 아주 좋은 화창한 날씨였다.
하타카쯔항에서 한국전망대를 찾아가는 길은 자동차 두 대가 겨우 교행 할 수 있는 중앙 차선도 없는 좁은 도로였다. 대마도의 모든 도로는 이렇게 길이 좁고 그 길에는 중앙선이 없거나 하얀선 아니면 노란 점선의 1차선 길로 시속 40km 이상으로는 달릴 수 없는 도로였다. 대마도 최북단의 와니우라의 한국전망대는 한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까지 49.5km거리에 있으며 한국이 일본의 후쿠오카보다 훨씬 가깝다. 이 전망대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한국의 학자에게 자문을 구해 완성되었으며, 한국산 자재 구입 및 전문가 초빙 등 철저하게 한국양식으로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1703년 대마도주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선린의 관계를 위해 파견되었던 역관사 104명이 풍랑으로 모두 숨지자 이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가 있으며, 근래에 당시 파견 되었던 역관사 명단이 발견되어 비의 전면에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새겨 두었다.
이번 탐사여행은 대마도속의 ‘옛 선조들의 애환 되새김의 길 탐방의 길’인 터라 예전 통신사의 행적을 따라 걸을 수 있었다. 우리가 통신사라 이름 한 것은 ‘교린지신(交隣之信), 교린지도(交隣之道), 교린지의(交隣之義), 교린지예(交隣之禮)’를 바탕으로 지은 말이라 한다. 교린과 전쟁의 흔적들을 발견 할 수 있다. 교린의 흔적은 이즈하라시에 있는 ‘고쿠분자(國分寺) 옛 조선통신사 객관터’, ‘조선통신사의 비’와 같이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것들, ‘표류민 거주지 유적’과 같이 민간인 관련 장소, 그리고 이 도시의 주요 상징물인 ‘아메노모리 호슈(묘)’등이 있다. 교린이란 이웃과 교류라고 할 수 있다. 대마도에 교린의 주 대상은 한반도에 존재하였던 여러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웃이란 국가의 경계선을 벗어난 이웃을 말한다. 일본은 그 점에서 ‘나’혹은 ‘우리’의 일부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린유적도 한국, 구체적으로 조선왕조와의 교류와 관련된 유적들이었다. 사실 임진왜란 이후처럼 대마도가 교린에 힘쓴 적도 드물 것이다.
임진왜란은 조선뿐만 아니라 대마도에 막대한 피해를 준 전쟁이었다. 그리하여 초대 대마도번은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우호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것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년간 12회에 걸쳐 진행된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이 있었다 한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일본에 선진 문화를 전파하였다.
처음에는 일본 막부장군식 계승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에서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로 변하였다. 통신사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활발한 교류와 우호관계를 21세기 한일 우호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1992년 ‘조선통신사비’를 세웠다고 한다. 조선통신사의 비가 있는 바로 옆에는 쓰시마 역사 민속자료관이 있다. 1978년 12월에 개관하여 도내의 문화재, 고고역사자료, 민속자료, 소(宗)家 문고 등 귀중품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민속축제로 조선통신사 행렬을 300~500명씩 구성해서 통신사 복장을 하고 거대한 대마도 축제를 해마다 열어 우리나라 정조대왕의 수언 행궁 행차처럼 재현하고 있다 한다. 참으로 다행스런 풍습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역사적 의의가 깊은 면암 최익현 석생의 순국비를 참배할 수 있다. 최익현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여 다음해 6월 제자 임병찬과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하다 체포되어 대마도 이즈하라 우술령에 유배되었던 분이다. 순국한 애국지사를 추모하는 한인단체가 세운 것이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비 이다. 면암 선생은 대 유학자요. 항일 독립투사로 유림의 문하생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1986년 한일 양국 유림들이 힘을 모아 이즈하라의 수선사(修善寺)에 순국비를 세웠다. 우선사는 이즈하라 주택가의 중심에 있다. 수선사 주변은 온통 일본인 가족들의 납골묘가 가문별로 설치되어 있다. 그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죽어서도 가족과 옆에 살도록 하는 풍습이 있어서 마을 주택가 인근에 납골묘를 만들어 안치를 한다고 한다. 이 수선사는 백제시대 백제인 어느 비구니가 세운 절이라 전한다.
다음으로 역사적인 방문지로 비운의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돌아보았다.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831년 5월 대마도 번주(藩主) 소 타케유키 백작과 결혼을 하였다. 이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기념하는 뜻으로 건립되었으며, 현재 이곳의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황제의 후궁, 양귀인(梁貴人)의 출생으로, 1917년 황적에 입적하였으나 일본 황실의 강요로 1925년 일본으로 이송되어 대마도 번주와 결혼을 한 것이다. 그러나 대마도 번주의 횡포와 옹주 소생인 딸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정신질환을 앓게 되어 결국 이혼하였다. 1930년 이후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질병 치료를 받았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으로 귀환하여 고궁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9년 4월 21일 타계하였다. 묘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능에 있다. 덕혜옹주의 파란 많은 넋을 기리는 결혼 기념비가 대마도 이즈하라공원에 세워져 망국의 한이 서린 옹주를 기리는 듯 우뚝 서 있다.
다시 부산을 통해 귀국하는 이즈하라 항구에 들어서면 우리와 마주하는 것은 포구의 맞은편에 있는 아리아케(有名)산을 등반하였다. 등반을 하면서 즐거운 것은 나무들을 보는 일일 것이다. 히로시마 원폭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오직한가지 식물 삼나무. 삼나무는 대마도만의 특산은 아니고 일본 전체의 특산이라고 할만하다.
대마도는 우리나라 관광객이 먹여 살린다. 이곳 젊은 층은 본토로 나가고, 원주민 중에서 노인, 빈민층이 재래식 주택에서 가난하게 산다. 우리나라의 농어촌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곳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철 낚시관광, 쇼핑, 골프, 해수욕 관광을 하려고 대마도를 찾는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일구었던 터전에 가서 섬 주민들이 생계를 돕는 것은 어쩌면 핏줄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혈연 의식의 발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적 증거자료나 거리상으로나 분명 대마도는 경상남도의 한 섬이었음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대마도를 무력으로 강점한 뒤 여태까지 살았으니 대마도를 돌려받을 때 1592년 임진왜란부터 2013년 까지 420년간의 토지사용료를 악착같이 받아 내야할 것이 아닌가…….
부산항을 통해 귀환하는 배선희 군청 산우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의 뇌리엔 조선 역관사 위령비에 써놓은 시구가 맴돈다. ‘서녘 바다 우뚝 서서 파도 따라가는 마음. 구름에 실려 만나러 가고 싶어라, 두고 온 우리여. 백팔 명 백팔번뇌로 망부석을 향한 역관의 넋이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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