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명장 권율장군 묘소가 양주 장흥단지 내에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바닷가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 기운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날아가네
나라 걱정에 뒤척이는 밤
기운 새벽달은 활과 칼을 비추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감수성이 엿보이는 한산도야음에서-
1593년 계사년
수많은 권율장군의 역사적 기록에서 가장 뿌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야사~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서
물러서지 않음을 으뜸으로 생각하였기에
전장으로 나가기전 전의를 불태우며 가족의 생명을 빼앗고 ......
하늘에 맹세하며 자신을 다독였던 그는 우리의 위대한 조상님중 한분이십니다.
이름 : 권율
출생 : 1537년
사망 : 1599년
약력 : 1587년 전라도 도사
1591년 의주목사
1588년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
1596년 충청도 순찰사, 도원수
현재 장흥 권율장군묘소에
형님과 아버지(권철)의 묘소아래
권율장군에 묘소가 자리하고있습니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중 행주대첩의 주인공이자.
임진왜란의 영웅이기도하죠~
임진왜란 3대 대첩 (진주대첩,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문인석과 망주석으로 꾸며져 있답니다.
권율장군은 무인출신이 아니라 문인출신의 장군이였답니다.
늦은 봄날~ 찾아본 권율장군의 묘소에서 다시 한번 임진왜란의 아픔과
이땅의 수호를 위하여 한목숨 다 바친 임진왜란이란 시대의 본보기 장군이라 할 수 있죠
물론 소임이 나라의 장군으로 위치해 있었지만
지략으로 힘든 시기에 많은 혁혁한 공을 세우는 지략가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하는 뿌나생각입니다...^^;;;;
이렇게 모셨진 곳이 바로 권율장군님의 묘소입니다.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우측이 죽산박씨, 좌측이 창녕조씨, 가운데가 권율장군의 묘입니다.
묘소의 가장 위쪽에서 아래로 본 전망의 파노라마 ^ ^;;;
권율장군의 묘앞에서 바라보는 이곳은...
장흥 국민관광단지에 있습니다.
삼문을 열고 바라보면 멀리 권율장군의 묘소가 눈에 들어옵니다.
비각
신도비는 종 2품 이상의 공신이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묘의 남쪽 가까이 세웠다.
저선국 팔도 도원수 증
영의정 영가부원군 시 충장 권공 신도비명.
조선국 팔도 도원수 증 영의정 영가부원군 시 충장 권공 신도비명 셩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신흠이 글을 짓고, 정헌대부 에조파서 겸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 오위도 총부 도총관 원임 규장각 직제학 이융원이 쓰고 아울러 전서하다.
-바람통신 문화탐험가 바람님글에서-
신도비
공몰후 269년 정미년 8월에 후손들이 세웠다고 써있는데, 공이 1599년에 죽었으니, 269년은 1867년이 되는데, 이 해는 정미년이 아니고 정묘년인데
-ramsid2 님의 글에서 인용-
권공 신도비 1861년에 세운 신도비
신도비 뒷면
재실입니다.(묘제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
묘소 뒤편에 마련된 산신석
아버지 권철 묘소의 뒤쪽에 있습니다.
권율장군묘
도기념물 제 2 호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 168 - 1
권율장군의 묘소 파노라마
하나하나 열거한 곳을 다~ 보시고 나시면 이제 이렇게 뿌 듯한 맘으로
다시 한번 임진왜란의 명장이신 권율장군을 기억하면서
집으로 향해봅니다.
권율은 조선시대의 명장이었다. 158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의주 목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로 임명되어 방어사
곽영의 지휘 아래 용감히 싸웠으나 지고 말았다. 그러나 권율은 이에 굴하지 않
고 의병 1천여 명을 모아 금산군 이치에서 왜군을 무찔렀으며, 그 공으로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다시 군사 8천여 명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진격하다가 도중에
수원 독왕산성에 주둔하여 튼튼한 진지를 쌓으면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왜군과
맞서 싸워서 물리쳤다.
1593년에는 2천8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여기서 3만에 이르는 왜군과 맞서 싸워 크나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부녀자들도 앞치마에 돌을 날라 싸움을 도왔는데, '행주치마'
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싸움이 유명한 '행주 대첩'
이며 권율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었다. 임진왜란 7년간 우리의 군대
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장군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2대
명장으로 손꼽힌다.
본관 안동. 자 언신(彦愼). 호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시호 충장(忠莊).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이듬해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여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梨峙)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또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권율 (1537~1599)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 이치대첩등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육전의 명장
도원수 권율장군은 1537년 강화도 연동에서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158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사헌부 감찰, 낭관 등을 거쳐 1591년 의주목사가 되었어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방어사 곽영에 따라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하다
가 용인에 이르러 왜군에 패배를 당하고 광주로 되돌아 갔어요. 그 후 장군은 도내 유력 인사와 동
맹을 맺고, 이웃고을에 모병 격문을 돌렸으며, 지방민의 인심을 수습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악법을
발표합으로써 1500여명의 군사를 모아 전열을 재정비한 후 다시 북진하였어요.
그후 황진과 함께 이치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왜군을 맞아 싸워 격퇴시킴으로써 호남을 보존했
대요. 그 공으로 그해 나주목사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고,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북진해서 수원의 독성에 들어가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공격해오는 우키다군을 지구전과
유격전으로 격퇴하였대요. 1593년 명나라 군과 협력하여 서울 수복작전을 펴기 위해서 군사 2천여
명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대요. 그해 2월 왜장 총수 우키다를 비롯하여
왜군 3만명이 공격하여 오자 일사불란한 통솔아래 관군과 의승병이 분전하여 적에게 막대한 손해
를 입혀 격퇴하였다고 하네요. 이것이 행주대첩이예요. 그 뒤 왜군의 재침을 경계하여 파주상성으
로 옮겨가거 전세를 관명하였다고 해요.
그동안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이 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상태에 들게 되자, 장
군은 전라도로 돌아갔대요. 그해 6월에 도원수가 되어 영남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1595년에 도망병
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 판윤에 재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 충청도 관찰사를 거
쳐 이듬해 다시 도원수가 되었대요. 1597년 정유재란 때 명의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의 도산선을
공격하였으나 퇴각령으로 철수하였고 순천의 왜군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려하는
명장들의 비협조로 실패를 하였다고 하네요. 1599년에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서거한 후 영의정에 추종이 되었고,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대요. 행주의 기공사에 제향되었으
며, 시호는 충장이라고 하네요.
현지교통 : 1) 불광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의정부행 완행버스 이용, 장흥면 하차 / 수시 운행 /
40분 소요 (버스 하차 후 도보 20분 거리)
2) 의정부나 신촌역에서 교외선 열차 이용, 장흥역 하차 / 하차 후 도보 20분 거리
도로안내 : 1) 구파발 - 벽제3거리 (우회전) - 39번 국도로 8km - 장흥역 - 349번 지방도로 - 장흥
국민관광지 관리사무소
2) 구파발3거리 - 북한산성 가는 길로 400 ~ 500m - 349번 지방도로 - 14km 가면 장흥국
민관광지 관리사무소
여행팁!!!
행주대첩제관하여~
[축제명: 행주대첩제 ]
◇지역명 경기도 고양시
◇축제 영문명 The Great Battle of Haengju Festival
◇주최/주관기관 고양시/고양문화원
◇최초개최연도 1990
◇개최시기 3월14일(1일간)
◇축제 성격 전통문화축제
▶ 축제의 유래 및 특징
임진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 기념일을 맞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권율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오늘에 일깨움으로써 행주얼을 이어받고 향토애를 고취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개최 (최초 개최시기는 불분명하나 행주대첩을 기준해서 1996년 현재 403주년으로 추정)
권율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충장사에서 제례를 행하고 궁도대회,
사생대회 등의 행사를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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