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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향기/가끔책도읽고

더불어 숲/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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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야 말로 인간이기에 있어야 할 시간의 기품입니다.

 

어떤 진실은 그것이 고백을 닮을 때 더욱 절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타협의 결과 가능해진 주 나라의 공동번영이 분쟁의 씨앗이 되었던 땅덩어리 전체의 가치보다 수천 배 컸음을 후세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생각하면 전쟁의 승패는 물론이고 나라의 흥망 역시 역사의 흐름이라는 유장한 세월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한바탕 부질없는 춘몽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금세기에 보여준 광기 어린 전쟁과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는 종교적 반목과 쟁투에 생각이 미치면 국가라는 틀의 완고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인류사가 이룩해 온 문명은 개별 국가의 흥망과는 상관없이 이어져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그리스 로마의 문명이 그렇습니다. 나라가 없어진 것을 망이라 하지 않고 도가 없어진 것을 망이라 했던 고인의 역사관을 수긍한다면 국가가 문명을 담는 그릇이 못되고, 문명은 국가라는 그릇에 담기에는 너무나 크고 장구한 실체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생각을 적은 그릇에 간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능 이겼다는 외침과 나는 이겼다는 외침 사이에는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가 우리드로 하여금 씁쓸한 감상에 젖게 하는 까닭은 아마 아직도 내가 우리를 이겨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철학이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연극이 파하고 관객들이 극장의 가상공간으로부터 저마다 생활 현장으로 돌아오면 그 달구어진 열기가 냉각되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무대와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연극은 그것이 아무리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고 하더라도 삶의 현장에서 부단히 직면하는 현실과는 역시 아득한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용은 자기와 다른 것, 자기에게 없는 것에 대한 애정입니다.

 

외부세계와 인간 존개가 직선적으로 대면했을 때 돌출하는 충격. 세계는 저기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저것과 나의 대면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는 싱싱한 의문에 충실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다혹함과 충격은 현장을 떠나서는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것은 한 장의 사진으로 만들어 사유화하려는 욕심은 우리들의 정신을 박제화하는 상투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해야 합니다.

 

그의 글으 그간 우리가 자칫 잊을 뻔한 모성의 미학을 갖춘 경어체를 살려내면서 세상의 여러 도그마들과도 쉽사리 대립하지 않는 유연한 화해를 만들어 냅니다. 

 

그 20세기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잔혹한 아픔 하나쯤 갖지 않은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분단에서 오는 거대한 국력의 소모를 청산함이 없이 냉엄한 국제 사회에서 우리의 민족적 자존을 키워나가기는 불가능할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연초가 신대륙으로부터 도입되었는가를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사벨라 여왕과 후아나 공주에게 바치는 바닷사나이 콜럼버스의 연정으로 격하시킨다는 것은 더욱 가당챦은 일입니다.

 

21세기에도 청산되기 어려운 식민주의적 국제원리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가 서쪽으로 간 개인적인 이유는 더욱 작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속에 엄청난 사회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의 건설에 앞서 더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은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창조적 긴장으로 이끌어가는 지혜의 계발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그에게 주는 시계는 그의 삶과 노동이 되어 갠지스강과 함께 흘러갈 것입니다.

 

일찍이 네루가 격찬했듯이 '밑바닥을 흔드는, 급소 중의 급소를 꿰뚫어보는 천재/가 번뜩이고 있었습니다.

 

인고의 긴 세월을 뒤로 하고 바야흐로 맞이한 인디라의 행복을 상상하는 일은 참으로 흐뭇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사의 곳곳에는 출신과 성분을 뛰어넘는 개인이 얼마든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디와 네루의 차이는 두 사람의 개인적 차이라기 보다는 인도 사회의 복합성이 두 사람의 인격과 방법상의 차이로 표출된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내게 가장 정직한 사랑의 방법을 묻는다면 나는 '함께 걸어가는 것'이며 '함께 핀 안개꽃' 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근대 이후의 산업화의 과정은 한 마디로 탈신화와 물신화의 과정입니다. 인간의 내부에 있는 '자연'을 파괴하는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외부의 자연을 허물고 그 자링 '과거로 된 산'을 쌓아온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일본을 '있다'와 '없다'라는 2진법의 언어로 일도양단할 만큼 그 인식이 감정적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관습과 문서를 너그럽게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은 기어이 우리의 잣대로 재단하려고 하는 아집마져 없지 않습니다. 과거의 은원이 있는 당사자들 사이의 인식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호수에는 그 호수에 돌을 던진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지게 투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후지산의 정상에서 군림하고 있는 냉혹한 백설은 사랑 할 수 없지만 그 인색한 눈 녹는 물로 살아가고 있는 아사쿠사의 근검과 인내는 사랑할 수 있는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서슬 푸른 사무라이들의 일본도 아래에서 살아오는 동안 스스로 인정을 단념하고 차디찬 돌멩이 한 개씩 가슴에 안고 있는 외로움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일본인들이 몸에 익히고 있는 겸손과 절제와 검소함이 비록 쓸쓸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들의 헤픈 삶을 반성할 수 있는 훌륭한 명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성을 당시의 심정으로 읽는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동차의 속도와 비행기의 높이에 익숙해진 우리들로서는 우선 우리의 속도 감각이나 공간 정서가 당시로 되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변해 있습니다. 더구나 전쟁이 판이하게 달라지 오늘날에는 장성을 쌓고 국경의 근심을 덜었던 당시 사람들의 안도감을 실감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하물며 이 장성 앞에서 말머리를 돌릴 수 밖에 없었던 북방 민족의 막막한 체념이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배어 있는 애끓는 별리의 아픔과 참혹한 희생에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어느 한사람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용으로 우뚝 서서 미연에 침략을 단념케 하였다면 참으로 다행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리장성의 대역사를 찬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의 무모함을 타매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리장성을 찬탄할 수 없는 까닭은 장성의 축조는 어김없이 민초들의 곤궁과 분노로 이어지고 천하를 다시 대란으로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 무모함을 타매할 수 없는 까닭은 잔혹한 희생에도 그나마 장성을 쌓아 전쟁을 막으려 했던 일말의 고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도도한 욕망의 거품에 탐닉했던 광기의 세월을 돌이켜보게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작은 담장을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을을 지키는 성이 없고 나를 방어할 성벽이 없다면 제 집의 담장인들 온전할 수 없음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도한 욕망의 거품으로부터 진솔한 인간적 가치를 지켜주는 보루를 쌓을 수는 없는가, 그리고 이러한 보루들을 연결하여 20세기를 관류해 온 쟁투의 역사를 그 앞에 멈추어 서게 할 새로운 세기의 성벽ㅇ르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만리장성은 이 모든 생각을 싣고 강물처럼 가슴속으로 흘러듭니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자행한 만행이라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에 대한 분노와 충격을 넘어선, 인간서 자체에 대한 좌절이라고 해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쟁 범죄에 대한 독일인들의 사죄는 엄숙할 정도로 철저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웃 일본의 이른바 '유감'과 같은 형식적 외교 언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우슈비츠는 단지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찬미하고 있는 모든 '번영의 피라미드'에 바쳐진 잔혹한 희생의 흔적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내면보다는 외형의 화려함이 우리의 시선을 독점하고 있는 오늘의 풍토에서는 전도된 가치가 얼마나 끔찍한 희생을 동반하는가를 묵상하는 제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우리들로서는 앞으로 준비하고 겪어야 할 통일과정의 여러 과제를 독일의 경험으로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통일은 물론 이산과 증오를 청산하는 것일 뿐 아니라, 막대한 분단비용을 청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믿는 허상을 깨뜨리는 것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뜻을 바쳐야 할 곳은 수단이 아니라 아름다운 대상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자기의 영혼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을 갖지 못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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